“전설이 되어버린 전시 8:
<포스트 휴먼전>, 새로운 인체예술의 최전선

고동연 (미술사)

사이보그 선언과 포스트휴먼의 시대
“사이보그는 사이버네틱한 생명체이다. 그것은 인간과 일반 생명체와의 혼합물이며, 사회적 리얼리티와 가상성의 창조물이다. 신화적인 시기인 20세기 후반 이 시점에서 우리 모두는 기계와 생명체의 혼용체로서의 가상적 괴물(chimera)과 다를 바 없다... 사이보그는 우리의 존재방식(ontology)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정치적 책략(politics)이 될 것이다.” (149-50)
1)

 

1991년 여성학자이자 도나 하라웨이(Donna Harraway)가 발표한 사이보그 선언은 인간과 기계의 만남이라는 새로운 명제에 있어서 가장 긍정적이고 유토피안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사이보그는 각종 자연적인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시대의 인간상에 해당한다. 특히 여성학자이자 히피 세대로서 하라웨이는 생물학적인 성징에 근거를 둔 성차별이 사라진 포스트휴먼 세상을 꿈꾸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포스트휴먼 전시회의 기획자 제프리 다이치(Jeffrey Deitch)는 다소 비평적인 입장에서 포스트휴먼 시대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2) “포스트휴먼의 시작은 개인과 작가에게 전에 없는 자유를 줄 것인가? 우리는 거의 우리를 재창조하는 데에 있어 무한정한 능력을 부여받고 유전자 계보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우리는 외모를 통하여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게 될 것인가?... 우리는 보기에 좋은 것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몸을 새롭게 재구축하는 과정에서 선악을 구분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3) 물론 다이치의 전시는 포스트휴먼 시대를 비판하기 위하여 기획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언급하고 있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초 포스트휴먼과 연관된 각종 사회 현상들을 긍정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영화 <터미네이터>(1984)에서 인간을 파괴하기 위하여 미래에서 날아 들어온 사이보그의 이미지가 전시회 도록 앞쪽에 배치되어 있고, 이미 타계한 마이클 잭슨의 얼굴 위로 “앞으로 30년 안에 진짜 인간을 그 복제로부터 구분할 수 없을 것이라는 우리의 두려움은 더 이상 공상과학 소설에나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구가 콜라주되어 있다.


그렇다면 포스트휴먼 전시와 하라웨이가 사이보그가 나온지 20년이 지난 2010년, 포스트휴먼이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하라웨이가 예견한 바와 같이 각종 정체성은 사라졌고 우리는 인간과 기계, 혹은 물질과 가상의 중간 상태에 놓이게 되었는가? 포스트휴먼 시대에는 전통적인 서구 휴머니즘이 이상화하여 온 인간 고유의 몸, 정신, 정체성 등의 개념이 영영 해체될 것인가? 즉 다이치가 우려한 바와 같이 포스트휴먼 시대는 과도한 과학만능주의와 외모지향주의시대의 또 다른 이름인가?  

 

1992년 그리고 포스트휴먼 전시
“새롭게 형성된 자아는 자연적이라기보다는 개념적이다.” (다이치)

 

다이치가 예로 들고 있는 포스트휴먼 시대의 징후는 1980년대 미국사회에 팽배하였던 자기도취적, 자기 홍보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자신의 행동과 외모, 그리고 의식까지 외부의 힘을 빌어서 개조하려고 분주한 세태에 대하여 그는 우려의 목소리를 높인다. 게다가 매일 뿜어대는 텔레비전의 비쳐진 가상현실들은 “절대적으로 옳고 진실된 자아의 진정한 모델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각인시켜준다. 

 
또한 전시회 도록에 포함된 1980년 이바나 트럼프, 독재자와 같은 레이건의 모습 등은 포스트휴먼 현상이 결코 단순히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사회상의 변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시켜 준다. 자살기계로 유명한 잭 케보르키안 의사의 모습에서와 같이 결국 과학기술을 통하여 인간의 생로병사를 좌지우지 하려는 움직임 또한 정치적, 경제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성형수술은 차치하고라도 유전자를 제거하거나 장기를 이식하는 일, 신체적으로 부자유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과정도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힘을 지닌 계층의 이해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된다. 따라서 포스트휴먼에 대한 다이치의 접근 방법은 철학적이거나 미학적이라기 보다는 문화 비판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특정한 사회적 이슈나 비판적인 주제를 가지고 전시회를 기획하는 방식은 1990년대 초에 많이 사용되었었다. 동시대에 미술사에서는 여타 인문학 분야로부터 비판적인 이론을 적극 도입하게 되었고 순수 예술과 기타 시각문화나 대중문화의 변화를 함께 제시하려는 새로운 박물관학이 등장하였다. 1992년에 열린 휘트니 비엔날레에서도 인종 차별, 동성애 혐오와 같은 사회적 이슈에 따라 주제별로 작가가 선정되고 전시되었다. 실제로 휘트니 전시회에 등장하였던 마이크 켈리(Mike Kelley), 폴 맥카티(Paul McCarthy), 찰스 레이 (Charles Ray), 신디 셔먼 (Cindy Sherman) 등의 미국 작가들은 포스트휴먼 전시회에도 대거 참여하였다. 그러므로 포스트휴먼전시는 실험적인 작가들이나 그들의 새로운 작업을 보여주려는 의도보다는 ‘신선한’ 큐레이터의 특정한 접근방법을 보여주려는 목적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전시가 포스트휴먼이라는 거대한 주제에 집중하다 보니 작가들의 다양하고 개인적인 관심사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작가들에 대한 세밀한 분석은 인간소외, 외모지상주의, 불확실한 정체성과 같이 비교적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주제에 묻혀 버리고는 하였다. 결과적으로 ‘몸’이나 정체성이라는 유사한 주제를 다루는 작가들이 추구하는 차이점들이 덜 부각되었다. 예를 들어 로버트 고버(Robert Gober)의 잘려진 다리와 초현실적인 실내가 암시하는 동성애적인 코드, 제인 안토니(Jane Antoni)이나 수잔 엣킨(Suzan Etkin)의 작업에 등장하는 사라지고 흔적으로밖에 남을 수 없는 여성의 존재감은 별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1990년대 초 ‘에이즈 위기’를 동성애자들에 대한 하늘의 심판으로 보도하였던 억압적인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사라져간 동성애 친구들을 기억하려는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Felix Gonzalez-Torres)의 몸짓이 지닌 저항적인 의미는 읽혀지지 않았다. 이후에 등장하는 미술비평이나 미술사가 정체성의 문제를 중시하게 되는 점을 감안해 보면 다이치가 주장하는 포스트휴먼 상황은 지나치게 서구 중심적이며 1980년대의 보수적인 문화 비평에 치중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튜 바니(Matthew Barney), 다미엔 허스트(Damine Hirst), 그리고 찰스 레이의 설치 작업들은 점차로 거대해지고 스펙타클한 성격을 지닌다. 허스트 작업에서 사용된 과장되고 인위적인 외형과 생명력을 잃은 ‘박제’들이야말로 포스트휴먼 시대의 위기감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하다. 데니스 애덤스(Dennis Adams)의 패트리아 허스트 시리즈는 직접적으로 포스트휴먼과 연관된 과학 기술이나 사이보그의 모델을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다이치가 규정한 ‘자아의 진정한 모델’이 혼돈되는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애덤스는 개념미술가, 공공예술가, 건축가로서 주로 미디어 사진을 콜라주한 작업들로 유명하다. 신문 재벌 허스트가의 손녀 패트리샤 허스트의 변천사를 다룬 <패트리샤 허스트 1979-1989>는 그녀가 1975년 납치된 후에 감옥에서 풀려나고 경호원과 결혼하는 과정을 26개의 이미지에 담고 있다. 최초의 사진에서 그녀는 ‘순진한’ 대학생으로, 이어서 납치를 당한 후에는 미국 서부에 존재하는 극좌, 폭력 해방기관의 일원으로 은행을 터는 강도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풀려나와서는 결혼식 신부로 변화한다. 특정한 사회적 계층이나 이데올로기의 경계선을 넘나들었던 그녀의 모습이야말로 불안정한 정체성의 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미묘한 표정과 외모의 변천사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애덤스의 작업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과연 포스트휴먼 시대에 우리의 몸과 정체성은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

 

포스트휴먼 시대의 정체성
외모의 변화가 정체성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의 문제는 이미 추리소설이나 <페이스 오프>와 같은 공상과학 영화에서만 다루어지는 소제가 아니다. 실제로 범죄자를 잡는 일에서부터 성전환 수술을 한 남성이나 여성의 주민등록증을 갱신해 주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불안전한 정체성의 문제는 이제 우리의 삶속에서 일상화 되었다.


2009년 일본에서는 경찰의 포위망을 피하기 위하여 자신의 외형을 지속적으로 바꾼 범인이 2년 7개월 만에 잡혔다. 여기서 일본 경찰은 범죄자의 외형이나 외형을 이루는 물리적인 영역과는 무관하게 범죄를 수행하였던 범죄자의 연속적인 정체성을 상정하였다. 반면 외모의 변화 자체가 정체성이나 자아에 대한 의식을 바꾼다는 연구들도 나오고 있다.『소비되어지는 몸(Body Consumed)』의 저자인 소렌 아스케가드(SØren Askegaard)에 따르면 성형수술은 자신의 몸과 정체성을 분리하고 적극적으로 외형을 교정하고자 하는 의지의 한 표현이다. 4) 이러한 이론적 근거에서 보면 외모와 정체성의 관계는 훨씬 상호 보완적이다. 즉, 마음이 몸을 다스린다기 보다는 몸의 변화가 정체성에 대한 인식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포스트휴먼시대에 “개인은 단순히 본인의 행위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점차로 자신의 외모와 그들의 몸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게 된다”고 할 수 있다. 5)


아예 해체주의 철학에서는 정체성에 대한 집착 자체를 문제시 한다. 1990년에 발표된『젠더의 혼돈(Gender Trouble)』의 저자 주디스 버틀러에 따르면 정체성은 소위 사회화된 개념들이 교육화의 과정을 통하여 개인들에 의하여 ‘재현’되고 ‘행위 되어진’ 효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6) 물론 몸이 특정한 성의 개념이나 허상을 믿고 재생하는 주요한 수단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고정적이고 자연적으로 생성된 정체성을 부정하는 만큼 “자연스러운” 몸과 인위적인 몸을 구분하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이와 같이 변화된 인식이나 정체성에 대한 담론들이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몸과 전통적인 젠더의 구분을 인식하는 방식을 얼마나 변화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이 남는다. 예를 들어 하라웨이는 사이버그가 신체적인 결함을 극복하게 해주고 생물학적인 성의 구분을 혼돈시킬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그러나 성형수술이나 성전환 수술과 같은 시술은 우리의 몸을 인위적으로 개조함으로써 자연적인 몸으로부터 이탈하도록 하였을지언정 성 구분에 대한 오랜 허상을 깨뜨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각종 성형 수술이나 성전환 수술이 끊이지 않고 심지어 증가하고 있다는 인상을 갖게 되는 것은 전통적인 젠더의 개념에 근거한 남성적인 미와 여성적인 미에 대한 환상이 결코 수그러들지 않고 있음을 증명한다. 물론 이와 관련하여 실제로 악명 높은 프랑스 행위 예술가 작가 올랑(Orlan, 가명)은 1990년대 초 ‘육체적인 선언(Carnal Manifesto)’ 이후에 자신의 성형수술 과정을 비디오로 기록하고 관객들이 ‘강제로’ 감상하도록 하는 일련의 작업<부활-성 올랑>을 제작한 바 있다.


정체성을 외모의 변화와 무관하게 보는 입장이나 외모에 따라서 자의식이 변화하므로 정체성에 대해서 보다 역동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상반된 입장들은 우리 시대에 공존한다. 예술에서도 아담스는 허스트의 변화되는 모습을 통하여 정체성의 상실을 비판적인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다. 반면 호주 행위예술 스텔락(Sterlac)는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물리적인 퍼포먼스를 극대화하는 수단으로 각종 보철기구들을 사용한다. 매튜 바니의 초기 행위예술 <저지를 그리다(Drawing Restraint)> (1987-9)도 유사한 의도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포스트휴먼 시대에 전통적인 정체성의 개념을 파괴하거나 실제적이며 자연적인 인간의 몸이 소멸되도록 만들었다는 생각은 이론상으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미디어 아티스트 제프리 쇼우(Jeffrey Shaw)는 관객참여적인 설치 작업에서 관객의 신체적인 접촉을 부각시킬 수 있는, 적어도 관객들이 그와 같은 환상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드는 각종 메커니즘을 개발하여 왔다. <읽힐 수 있는 도시(The Legible City>(1998)에서 관객들은 자전거의 페달을 돌리면서 이에 따라 움직이는 ‘가상 화면’속의 변화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디지털 시대의 각종 영화들은 관객의 보다 ‘강렬한’ 체험을 위하여 배우가 카메라를 실제로 몸에 부착하고 외부의 사물이나 상대자들과 부딪치는 상황을 그대로  촬영해 낸다. 가상적인 현실이나 이미지가 강조되면 될수록 반대급부로 실제적이고 즉각적이며 “자연스러운” 몸과 경험을 강조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진다고 할 수 있다.

 

‘포스트’란 무엇인가?: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
문화비평가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이 지적한 바와 같이 ‘포스트’라는 말은 아마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가장 남용되고 있는 용어 중에 하나일 것이다. 저마다 미술의 역사에서, 문화의 역사에서 한 시대가 지나가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알리고 자 앞을 다투어 사용하여 왔기 때문일 것이다. 20년 전 포스트휴먼 전시도 동일한 목적을 가졌었다. 그러나 ‘포스트’라는 용어는 이미 한 시대가 종료하였음을 알려주기도 하고 이전 시대와 새로운 시대의 특성이 공존하는 상황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2004년 영국에서 전시되었던 한 작업을 소개하고자 한다. 사이몬 테갈라(Simon Tegala)의 <소생(Anabiosis)>(1998)은 현존하는 물질적인 몸과 그것의 살아 있음을 알리는 심장 박동 소리, 그러한 정보를 관객이 인식하도록 만드는 장치들로 이루어져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작가의 몸은 관객들에게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혀 다른 장소에 현존하고 있는 작가의 심장 박동소리가 전시 기간 동안에 디지털화된 시계를 통해서 업데이트 된다. 물리적인 세계가 해체되고 더 이상 실제적인 인간들 사이의 실제적인 대면의 기회가 줄어들고 있는 우리 시대에 관객은 작가의 생생한 심장 박동소리를 통하여 ‘소생’하려고 몸부림치는 작가의 물리적인 실체의 영역을 경험하게 된다.  


테갈라의 작업은 포스트휴먼 시대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던져준다. 기술과학이 인간의 예술과 문화, 그리고 존재를 변화시키는 방식에 대한 많은 이론들이 일종의 단절을 상정하여 왔다. 하지만 하라웨이가 예견한 바와 같이 더 이상 전통적인 인간의 몸을 상정할 수 없거나 다이치가 우려한 바와 같이 전통적인 정체성에 대한 기대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몸과 정체성의 문제 또한 아직도 복잡한 상태로 현대미술에 남아 있다. 안토니의 작업은 여성 미술비평에서 여전히 다루어지고 있으며 곤잘레스-토레스의 작업은 동성애의 성 정치학과 연관되어서 다루어진다. 가상현실에 존재하는 작가의 심장박동소리가 가상과 현실 세계 모두를 갈구하는 독특한 인간의 욕망을 오히려 상기시킨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질문이 우리시대에 가장 필요하고 적절한 것이 될 수 있을까? 포스트휴먼과 연관된 각종 과학적, 사회적, 문화적 현상들은 긍정적이던 부정적인 의도에서이건 간에 지속적으로 생겨날 것이다. 상업주의와 외모 지상주의가 결합하여 그와 같은 현상은 실은 가속화 될 것이다. 만약 그와 같은 흐름을 되돌릴 수 없다면 시급하게 제기되어야 할 질문은 가상의 현실과 실제의 세계가, 소위 기계와 인간이 어느 지점에서 만나야 하는 문제이다. 얼마만큼 우리는 기계의 간섭과 도움을 허용해야 하는가? 올랑의 작업에서 과연 어디까지나 긍정적인 산고의 과정이고 어디서부터가 그로테스크한 변태인가? 과연 어디까지가 ‘수정’에 해당하고 어디서부터가 ‘집착’이나 중독에 해당하는가? 혹은 얼마 전 성범죄와 연관하여 성적인 욕구를 제어하는 호르몬 투여에 대한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였는데 과연 그와 같은 능력이 누구에 의하여 어떻게 주어져야 하느냐?


포스트휴먼의 시대는 단순히 가상현실을 우위에 두거나 전통적인 휴머니즘에 대한 기대(그것이 허구이건 복고이건 간에)가 소멸된 시대가 아니라 더 복잡하고 복합적인 인식론적, 윤리적 문제들이 등장하게 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면에서 필자는 다이치와는 다른 위기감을 경험하게 된다.


저자: 고동연
미술사가, 한예종, 고대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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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onna Haraway, "A Cyborg Manifesto“ in Simians, Cyborgs and Women: The Reinvention of Nature (New York; Routledge, 1991), pp.149-181.

2) 다이치는 1990년대 초 시티은행의 예술 고문, 유명한 다키스 조나우(Dakis Joannou Collection) 재단 컬렉션의 자문위원으로써 주로 대규모 기업이나 미술관 규모의 컬렉션과 각종 현대 미술관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여왔다.

3) Jeffrey Deitrich, Posthuman, (New York: DAP and Amsterdam: Idea Books, 1992).

4) SØren Askegaard, “The Body Consumed: Reflectivity and Cosmetic Surgery,” Psychology & Marketing, Vol. 19, 10 (2002): 793.

5) Askegaard, “The Body Consumed,” 800.

6) Judith Butler, Gender Trouble (Berkeley and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0), 25.

© 2018. Koh, Dong-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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