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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아트와 하위문화:
영국의 인디펜던트 그룹과 1950년대 공상과학 영화 팬덤

고동연 (미술사)

왜 팝아트와 하위문화인가?
뉴욕의 시인과 동성애 화가들이 모인 그룹 내의 캠프(camp) 문화, 힙스터(hipster), 1950년대 공상문화 애호가의 그룹, 미국 캘리포니아 페러스(Ferus)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었던 ‘스터브(Stub)’라고 불리는 파도타기 족과 바이크를 즐기는 사진작가와 조각가들, 펑크, 얼터너티브 록 커뮤니티, 이스트 빌리지의 거리 문화, 낙서, 일본 오타쿠(おたく / オタク) 문화, 이들은 모두 두 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첫 번째로 위에 언급한 집단들은 하위문화라고 불릴만한 것들이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대중문화 대신 어른의 문화에 반대하는 청소년 문화, 백인의 주도권적인 인종에 반대하는 흑인 청소년들의 힙합 문화, 성적으로 소외된 동성애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성애 하위문화 등이 비교적 잘 알려진 하위문화의 대표적인 예들이다. 전쟁 직후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즈먼(David Riesman)은 순종적인(conformist) 문화에 반대하는 의미로 소외된 계층의 저항적인 문화를 가리키기 위하여 하위(下位)에 해당하는 서브(sub)문화라는 용어를 고안해 내었다. 그러나 1980년대 문화 연구가 등장하게 되면서 하위문화는 점차로 특정한 관심과 스타일을 추구하는 마니아적인 속성을 지닌 것으로 규정되었다. 즉 하위문화는 현대에 와서 저항의 의미를 넘어서서 매우 창조적이고 독특한 문화적 코드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위의 언급한 하위문화들의 두 번째 특징은 이들 그룹들의 스타일이나 관심사가 전후에 예술과 일상을 허문다는 기치아래 등장하였던 예술적 실험들, 특히 팝아트 작가들의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는 것이다. 물론 현대미술이 하위문화와 연관되는 경로는 다양하다. 작가 스스로가 하위문화를 즐기는 마니아층에 속하거나 필요에 따라서는 영국의 트레시 에민(Tracy Emin)과 같이 펑크 문화의 저항적인 측면만을 외부에서 차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다양한 하위문화의 소재나 시각적 특징들이 혼용되고 결합되면서 주류문화, 비주류 문화, 공식적인 대중문화, 저항적인 문화, 다수를 위한 문화, 소수를 위한 문화들 사이의 구분과 우월적인 체계가 혼돈되기도 한다. 캠프 문화는 그리스 회화나 조각에 등장하는 남자 누드로부터 1950년대 근육질 남성의 이미지가 등장하는 잡지에까지, 영국 인디펜던트 그룹의 멤버들은 전후 영국의 주요한 문인이자 초현실주의적인 비전으로 유명한 제이지 발라드(J.G. Ballard)의 소설로부터 저예산 공상과학 만화, 영화, 전후 플라스틱으로 만든 로봇에 이르기까지 고급문화와 저급문화, 혹은 소수 문화 사이의 활발한 교류와 융합을 일구어 내었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정작 팝아트와 연관된 담론들에서 작가들이 어떠한 대중문화, 혹은 소비문화의 부분들과 연관을 맺어 왔는지에 대하여 면밀하게 다루어 오지 않았다. 대신 비평가들은 모호한 대중문화의 정의, 비판 이론, 그리고 더 모호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만을 언급해 왔다. 과연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대중문화들이 존재하고 그 내부에서 갈등이나 서열은 없었는지, 구체적으로 작가와 대중문화와 어떻게 관계를 맺게 되는지에 대하여 세밀한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1950년대 영국 인디펜던트(Independent) 그룹의 이론가이자 작가로 참여하였던 에두와르도 파올로지(Eduardo Paolozzi)가 자신을 단순히 코카콜라 병을 그린다는 의미에서의 팝아트 작가로 분류하는 것에 대하여 반발하였던 것도 바로 이와 같은 비평적 상황에 의하여 야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작가들은, 특히 팝아트 작가들은 대중문화 중에서도 하위문화에 관심을 기울여 왔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팝아트와 하위문화가 일종의 실험정신, 나아가서 비판적인 정신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뉴욕에서 벽을 장식하던 거리문화는 극심한 빈부차이, 부동산 개발 논리에 대한 가난한 작가들과 거리 ‘창작인’들의 저항적 메시지는 담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저예산 공상과학 영화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지구 종말론적인 메시지는 궁극적으로 그 세대가 공유한 과학기술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을 반영한다.

 

또한 하위문화는 이미 존재하는 문화를 재활용한다는 면에서 기존의 오브제,기호, 사인을 재활용하는 팝아트와 유사하다. 구체적으로 하위문화 또한 팝아트와 유사하게 일상적이고 하잘것없는 물건이나 스타일을 사용함으로써 전통적인 미학적, 성적, 도덕적 기준에 항거하는 특징을 지닌다. 1979년의 하위문화에 관한 고전서『하위문화, 그 스타일의 의미(Subculture the Meaning of Style)』에서 저자인 딕 헤디지(Dick Hebdige)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옷핀(safety pin)이 펑크스타일을 착용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귀걸이나 몸의 장신구로 사용되면서 충격적이고 반항적인 인상을 주게 되는 경우를 설명한바 있다. 1) 유사한 맥락에서 데이비드 하몬스(David Hammons)는 여느 농구대와 농구공, 흑인의 레게 머리를 연상시키는 막대기들로 만들어진 작은 나무들을 전시장 안으로 옮기면서 인종차별과 연관된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를 암시한다.

 

따라서 필자는 현대 미술사나 비평사에서 가장 많이 담론화 되어 왔던 팝아트를 새로운 시각에서, 즉 하위문화와의 연관성 속에서 다루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팝아트의 확장된 사회적, 미학적, 미술사적 원류를 짚어 보고자 한다. 예컨대 워홀의 유명한 명언 “당신이 앤디 워홀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면, 그냥 내 그림과 영화의 표면만을 응시하라”는 비평가들이 팝아트의 소재가 지닌 다양한 사회적 의미에 대하여 침묵하도록 만들어 왔다. 하지만 대중문화가 아니라 하위문화라고 이야기를 바꾸게 된다면 전후 소비문화, 과학, 기술, 근대화와 같은 중대한 사회적 변화들에 대하여 작가들이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를 면밀하게 살펴볼 수 있게 된다. 1950년대 초 공상과학 영화로부터 영향은 받은 작품들이 염세주의적이고 종말론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면, 에민의 여성 생리대가 대도시의 가출 청소년들의 집단 하위 문화를 암시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팝아트의 소재들을 중성적으로만 바라보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연재될 전후에 등장한 팝아트와 하위문화와의 관계에 대한 글들도 ‘쿨’하고 표피적인 팝아트의 모습과는 다른 정열(?)적인 팝아트의 면모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에 첫 번째로 영국 인디펜던트 그룹과 전후 공상과학 영화 팬덤과의 영향관계를 파올로지의 작업을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인디펜던트 그룹의 1955년 전시 “인간, 기계, 그리고 움직임”
"당신은 샌프란시스코의 바에 있는 텔레비전에서 아폴로 우주선이 이륙하는 것을 본 후에 구석에 가서 웃옷을 벗은 구두닦이 소녀에게 당신의 신발을 닦이도록 할 것이다.“ (파올로지, 1971)

 

영국의 인디펜던트 그룹은 정확히 말하면 소규모 시각연구 단체라고 할 수 있다.2) 1962년에 미국으로 건너간 후로 팝아트의 주요 이론가로 더 잘 알려진 로렌스 알로웨이(Lawrence Alloway), 건축이론가이며『첫번째 기계미학 시대의 이론과 디자인(Theory and Deign in the First Mechanical Age)』(1960)의 저자인 레이나 번함(Rayner Banham), 얼마 전 프랑스에서 날라 들어온 디자이너 출신 파올로지, 리처드 해밀턴(Richard Hamilton) 등이 주축이 된 인디펜던트 그룹은 이후 1953년부터 1956년까지 4년에 걸쳐 전시회/이벤트를 열었고 현대미술에서 대중 소비문화의 가치를 탐구하기 시작한 선구적인 미술사조로 거론되어져 왔다. 3)그들의 가장 잘 알려진 포스터 <이것이 미래이다(This is Tomorrow)>(1956)에서 영국의 일반 가정을 침투한 축음기, 브로드웨이 뮤지컬, 포르노그래피 소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영향력을 떨쳐가던 미국 대중 소비문화의 산물이다.

 

여기서 인디펜던트 그룹의 전시 기획 중에서 “이것이 미래이다”가 대중 소비문화에 대한 그들의 동경을 반영하고 있다면, 1955년에 열린 “인간, 기계, 그리고 움직임(Man, Machine, and Motion)”전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이에 따른 자연과 문화의 변화상에 중점을 두고 있어서 주목할 만하다. 인디펜던트 그룹의 구성원들은 전후 유럽 디자인 교육의 수해자들로서 자신들의 전시를 위하여 특정한 매체나 문화권 사이의 우열을 가리지 않는 구축주의나 바우하우스식의 전시방법을 사용하였다. 결과적으로 관객들은 전시장의 벽면, 코너, 심지어 천장에까지 달린 화석의 부분을 확대한 사진들, 원시 가면, 원초적인 가옥의 형태는 인디펜던트 그룹의 드로잉, 자동차나 초기 비행기의 확대 사진들이 함께 볼 수 있었다.

 

특히 전시에는 과학 기술이나 미래상과 연관된 각종 전후 대중문화의 산물들도 선보였다. 해밀턴은 동료 작가들과 함께 전시 공간 한쪽에 주크박스를 틀어 놓아 관객들의 공감각적인 경험을 극대화 하고자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해밀턴은 일년후인 1956년에 열린 “이것이 미래이다”전에서는 영화 <금지된 행성(Forbidden Planet)>의 포스터에 등장하는 ‘로비 로봇(Robbie Robot)’과 마릴린 몬로의 확대된 컷-아웃을 입구에 설치하였다. <금지된 행성>은 1950년대를 대표하는 b급 공상과학 영화 중의 하나로 주인공 ‘로비 로봇’은 타락한 지구인들에게 그들의 식민지 상황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영화의 끝에서 회로 이상으로 파괴된다.

 

<금지된 행성>의 컷-아웃은 인디펜던트 그룹 내의 과학 기술문명을 보다 유머러스하고 심지어 성적인 대상으로 접근하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해밀턴은 그의 잘 알려진 <그녀($he)>(1958-61)에서 기계의 각 부품들이나 부분들은 인간의 신체, 특히 인간의 성적 부분들과 연관하여 재현해 낸 바 있다. (실제로 1954년에 발간된 베스트셀러,『숨겨진 설득자(The Hidden Persuader)』에서 이미 자동차를 연인으로, 그리고 각종 자동차의 부분들을 여성의 몸에 비유하는 광고이론들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금지된 행성>의 포스터는 인디펜던트 그룹 내에 존재하였던 과학기술에 대하여 양가적인 감정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인디펜던트 그룹의 건축 이론가 번함의 기계미학이 실증주의적이고 기능주의적인 측면에서 과학기술과 소비사회의 발전상만을 바라보고 있다면 해밀턴이 인용하고 있는 로비 로봇은 인간에 의하여 창조되었으나 결국은 파괴되는 프랑켄슈타인의 운명을 알레고리화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종말론적인 메시지, 미래에 대한 공포, 과거와 미래가 뒤엉켜 있는 혼돈의 상태 등은 공상과학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미래이다”의 서문에서 존 맥해일(John McHale)은 과학 기술문명의 발전은 우리로 하여금 환경을 인식하는 데에 있어 큰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과학기술문명의 발달에 따라서 이전까지 받아들여지던 실증주의, 발전지향적인 논리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맥해일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2차 세계대전, 냉전시대 초기에 핵(특히 1950년대 초에는 핵실험이 한창 진행 중에 있었다.)을 둘러싼 전 세계적인 두려움이 표출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과학 기술에 대한 불신은 전후에 번창하였던 공상과학 만화나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테마이기도 하다. 파올로지가 만든 공상과학류의 영화 <무의 역사(The History of Nothing)>에서도 선사시대의 유물, 타 문명, 화석과 함께 비행기나 과학 기술문명을 상징하는 이미지들이 병치되어 있다. <무의 역사>는 종말론적인 세계관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발전하였던 전쟁 직후 공상과학 만화와 영화의 팬덤을 연상시킨다고 하겠다.

 

1950년대, 공상과학 영화의 황금기
실제로 인디펜던트 그룹 내 디자이너이자 조각가인 파올로지는 1950년대부터 로봇이나 각종 공상과학 관련된 물품들을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1940년대 말 파리 체류기간을 통하여 보다 넓은 미국 문화와 물건들을 접한 파올로지는 자신이 수집한 '미친 고양이 아카이브 (Krazy Kat Archives)' 컬렉션을 1985년 빅토리안 앨버트 박물관에 양도하기도 하였다. 파올로지는 <크리스털 세계>(1966)로 유명한 영국의 공상과학 소설가 발라드가 발간하는 종합 문학잡지「구역(Ambit)」의 표지 일러스트레이터로도 활약하였다. 발라드 또한 1950년대 실은 화가로서의 커리어를 추구하면서 인디펜던트 그룹의 구성원들과 친분관계를 쌓은 바 있다.
4)

 

인디펜던트 그룹의 주요 멤버들이 미국 대중문화를 통하여 과학 기술에 대한 시각을 발전시킨 1950년대는 주로 b급 영화공상과학 영화의 황금기라고 불리던 시기이기도 하다. 5) 공상과학 만화들은 1930년대 미국에서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1940년대 처음으로 이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선보였다. 하지만 1950년대는 그 물량이나 인기에 있어서 전 세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공상과학 만화와 영화는 성장하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금지된 행성>은 물론이고 2005년에 스티븐 스필버그에 의하여 리메이크되었던 <세계의 전쟁(The War of the Worlds)>(1953), <외계에서 왔어요(It Came From Outer Space)>(1953), <사체 유기범들의 침공(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1956)은 모두 공상과학 영화의 고전에 속한다.

 

하지만 이들 영화들은 정확히 말해서 주류 대중문화로 분류되기에는 지극히 조악한 것들이었다. 당시의 영화들은 어색한 연기, 유치한 이야기구성, 부자연스러운 특수효과들로 인하여 현재에는 키치 중의 가장 키치적인 저급 문화로 취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1950년대 웨스턴, 낭만주의 시대의 고딕 소설, 스파이 소설 등의 다양한 장르들을 결합하여 나름대로 엄청난 서스펜스와 두려움을 자아내는 장르로 성장하는데 성공하였다. 특정한 마니아 계층을 주요 독자층으로 하는 공상과학 관련 잡지들이 1950년대에만 15개 정도 생겨났고, 같은 시기 동안에 공상과학 장르는 만화, 영화, 텔레비전 시리즈 등으로 확산되었다. 6)

 

또한 1950년대 지구나 인류의 종말과 그 이후의 미래라는 공상영화 특유의 소재는 냉전 시대와 ‘별들의 전쟁’으로 긴장이 극도에 달했던 역사적인 상황과도 맞아 떨어지면서 공상과학 영화 팬덤을 부추겼다. 한국전쟁 직후 당시의 강대국이었던 미국과 소련은 핵 협정에도 불구하고 핵실험에 박차를 가하였다. 미국은 1952년에 한 차례, 그리고 1954년 비키니 섬에서 핵 실험을 강행하였고 이에 소련도 1953년에 대규모 핵실험을 진행하였다. 따라서 전쟁 직후 세대들에게 적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한 방공호 대피는 학교 교육의 일부분이었다. 1950년대 공상과학 영화들에서도 인류의 멸망을 자초하거나 외계인의 침략을 받게 되는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핵의 무분별한 남용에 따른 것이었다. <세계의 전쟁>의 주인공 닥터 클레이턴은 원래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던 과학자이며, <지구가 정지한 날(The Day the Earth Stood Still)>에서 외계인은 아군과 적군으로 나뉘어서 싸우고 있는 지구를 화해시키기 위하여 방문한다. 또한 1950년대 초 미국의 각 공공기관과 할리우드까지 강타한 매카티의 청문회를 연상시키는 <나는 외계인과 결혼했어요.>에서는 평범한 남편이 엉뚱하게 외계에서 날아온 스파이로 등장한다.  

 

그러나 인디펜던트 그룹은 정치, 사회적 이슈보다는 미학적, 철학적인 측면에서 공상과학 영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파올로지의 콜라주에 등장하는 장면들은 부자연스럽고 키치적인 공상과학 영화의 장면들을 연상시킨다. 또한 해밀턴의 전시 프로젝트 <성장과 형태(Growth and Form)>(1951)에서와 같이 원초적인 형태가 가장 기술과학이 발달한 문명에서 발견되는 기계 형태와 유사한 향상을 띤다. 이것은 문명의 발전사를 결코 직선적으로 보지 않는 공상과학 소설의 주요한 시간적 테마, 혹은 ‘재미’와 연관된다.

 

예컨대 과학 기술의 지나친 발전과 서로 다른 문명의 흥망성쇠, 불확실한 미래는 공상과학 영화의 주된 소재이어 왔다. <금지된 행성>에서도 지구의 식민지에 해당하는 행성 '알테르 4(Altair IV)'은 영화 속에서 한때는 지구보다도 더 발달한 문명이었으나 멸망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주인공 로비 로봇은 이와 같은 상태를 지구에 알리기 위하여 인간 세계를 방문하게 된다.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파올로지와 발라드
유명한 공상과학 소설가 발라드의 <크리스털의 세계(The Crystal World)>(1966)에서 정글이 크리스털로 변해가는 과정은 지나치게 복잡해서 시간의 진행과정을 극도로 혼란시킨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과정에서 에너지는 고갈되고 결국 개체는 소멸되고 만다. 파올로지는 인디펜던트 그룹에서도 공상과학 소설에 등장하는 시간과 쇠퇴, 파괴 등의 심각한 테마들을 가장 집중적으로 다루어온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미술사에서 파올로지는 주로 콜라주 작가이자 로봇 모형을 만드는 조각가로 알려져 있지만 초기 아트 브뤼(Art Brut) 작가들과의 연관성, 시간과 공간의 혼돈에 관한 관심, 공상과학 소설가인 발라드와의 공동 작업들로 인하여 그의 미술사적인 명칭은 종종 혼돈을 빚는다. 그가 축약된 의미의 대중문화를 차용하는 팝아트 작가로 분류되는 것을 꺼려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파올로지는 디자이너였으나 1940년대 말 프랑스에서 거주하면서 한편으로는 파리의 아방가르드 작가들과 교류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자신의 룸메이트를 통하여 영국에서 접하지 못하였던 각종 잡지나 영화들을 접할 수 있었다. 이후 파올로지는 자신의 콜라주적인 판화들에서  자동차, 비행기, 텔레비전과 같이 문명을 상징하는 물건들을 화석, 신전, 르네상스 드로잉과 나란히 배치하였다. 끝없이 새로운 문명이 생겨나고 망하는 과정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1950년대 냉전 시대의 미국 공상과학영화로부터 1960년대 전후 일본의 오타쿠 만화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특히 파올로지는 12개의 시리즈로 이루어진 <뉴욕의 위트겐슈타인(Wittgenstein in New York)>(1964)의 작업에서 그가 평소에 관심을 지니는 모티브들을 총동원한다. 1960년대 이후 그의 작업에서는 수수께끼와 같이 보이는 과학적 데이터, 상형문자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작가는 시간적 이행과정의 불확실성을 강조하면서 점차로 의미를 전달하는 언어 체계에 있어서도 우연성이나 개방성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파올로지는 <철학자(The Philosopher)>(1957)에서 표면이 불규칙하고 덜 완성된 부품으로 이루어진 폐품 로봇을 선보였다. 그는 기존의 주요 기술 부분이나 부품들을 폐품 쓰레기장에서 주은 것들과 결합하였다. 특히 이 시기의 작품들은 제작의 모든 단계에서 전문인들의 협조를 얻고는 하였다. 여기서 이미 쓰고 버린 부품을 재활용해서 새로운 로봇을 만드는 과정은 망가진 로봇을 재활용하고 잿더미에서 새로운 문명이 시작되는 공상과학 영화의 에피소드들을 연상시킨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발라드와의 친분관계가 두터워지면서 파올로지의 작업은 과학에 대하여 더욱 냉소적이거나 심지어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게 되었다. 발라드는 1969년「구역」의 표지에 실린 벗은 여자 행위예술가가 자동차 뒤에 탄 상태에서 자동차가 부서지는 기이한 이벤트를 벌였으며 파올로지는 현장에서 관객으로 참여하였다. 7)

 

그 이후, 공상과학 영화와 현대미술
인디펜던트 그룹 이후에도 현대 예술, 문학에서 공상과학 영화에 대한 관심은 지속되어져 오고 있다. 로버트 스미드슨(Robert Smithson)의 <나선형 방파제(Spiral Jetty)>나 엔트로피 이론은 발라드의 1966년 <크리스털의 세계>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의 사이버 펑크 소설 <뉴로맨서(Neuromancer)> (1984)는 1950년대 미국 공상과학 영화나 소설에나 등장하는 유명한 모티브들, 고혹적이며 고전적으로 보이는 금발의 미녀, 화석과 매연으로 뒤덮인 초현실적인 공간, 그리고 삭박한 미래도시의 형상을 선보인다. 사이버 펑크의 경우 펑크나 고딕과 같이 오래된 문화적 유산과 인터넷이나 과학기술과 같이 전혀 새로운 감수성을 결합한 하위문화를 생성해 낸다. 영국의 인디펜던트 그룹이 관심을 지녔던 공상과학 영화의 이미지들이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끝없는 호기심은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공상과학 영화는 대중소비 문화라는 넓은 문화적 범주로는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을 지닌다. 시간과 공간, 미래주의, 과학기술과 현대사회, 휴머니즘의 몰락과 재부활이라는 테마들은 오히려 19세기 낭만주의, 고딕 소설, 초현실주의 문학과 유사해 보인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테마들은 현대미술과 문화에서도 반복되어 등장한다. 이서준 작가의 경우 2006년부터 현재 진행 중인 ‘유로파(가칭)’라는 프로젝트에서 지구가 언젠가는 걷잡을 수 없이 뜨거워지고 결국 인류가 지구를 탈출해야 한다면 새로운 이상향으로 유로파를 지목하고 있다. 목성의 위성이기도 한 유로파는 우주 과학자들이 탐사 계획을 세우고 있는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행성이기도 하다. 이에 작가는 인류가 도달하기 전에 유로파에 예술작품을 보낸다는 기이한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다분히 재기 발랄하면서도 실은 암울한 이 시나리오는 공상과학 장르에서 선보이는 단골 테마이다. 나아가서 불안전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변태적인 쾌감은 결국 대안적인 세계를 꿈꾸는 창작인들의 공통적인 환상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국의 인디펜던트 그룹의 작업들은 55년이 지난 지금에도 ‘팝아트,’ 혹은 ‘대중문화’의 정의로는 설명되어 질 수 없는 다양한 철학적, 정치적, 인문학적 관심사를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우리의 새로운 비평적 관심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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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ick Hebdige,『Subculture the Meaning of Style』(Routledge, 1981), p. 115.

2)그룹을 왜 ‘인디펜던트’ 그룹이라고 명명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신기하게도 그룹 멤버들이나 비평가들이 언급하지 않아 왔다. 대신 독립성을 의미하는 인디펜던트라는 용어가 1955년에 그들이 가진 토론에서 사용된 ‘독립적인 소비자,’와 연관될 것이라고 유추해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알로웨이가 인디펜던트 그룹으로부터 ’팝아트‘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다고 주장한 이후 인디펜던트 그룹과 연관해서는 그룹 명칭보다는 팝아트라는 용어에 대하여 더 많은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 Anne Massey ed.,『The Independent Group: Modernism and Mass Culture in Britain, 1945-59』(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95), p. 95-96.

3)인디펜던트 그룹이 기획한 전시들은 “삶과 예술의 평행선”(ICA, 1953), “인간, 기계, 그리고 모션” (ICA, 1955), “이것이 내일이다.” (Whitechapel Gallery, 1956), “미래의 집” (Olympia Gallery, 1956)’등이다.

4)발라드의 초기 소설에 등장하는 시각적인 이미지들은 실제로 인디펜던트 그룹 멤버들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단편 소설 “재앙”에서 핵전쟁의 희생자인 주인공은 반은 기계이고 반은 사람인 형태로 파올로지의 조각과 유사해 보인다.

5)세계 제 2차 세계대전 전에 등장한 공상과학이나 괴물 영화는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1925)나 쿠퍼의 <킹콩>(1933)과 같이 아주 잘 알려진 것들 이외에는 흔하지 않았다. 이들 영화들은 주로 미친 과학자나 인간의 탐욕에 의하여 희생되는 로봇이나 괴물을 다루고 있다.

6)미국에서는 1951년, 유럽에서는 1954년 컬러텔레비전이 처음 등장하였고 이후로 브라운관에서도 공상과학 시리즈들이 선보였다. 당시 공상과학 만화나 영화에 대한 팬덤을 반영하는 한 일례로 로버트 블로크의 소설 <사는 방식(A Way Of Life)>(1956)에는 핵으로 인하여 인류가 전멸한 상황에서도 공상과학 팬들이 살아남아서 지구를 재건한다는 황당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7)“ ‘Perverse Technology’: Dan Mitchell & Simon Ford interview J.G. Ballard,”「Hard Mag」no. 1 2005에서 인용; http://www.ballardian.com/perverse-technology-jgballard-hardmag-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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