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h, Dong-Yeon
고동연 高東延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반드시 꽃을 꽂으세요!:
히피, 캘리포니아 아상블라주, 사이키델릭 아트
고동연 (미술사)
‘히피’와 팝아트: 어려운 조합?
하위문화에 대하여 연재를 계속하면서 1960년대 말 대표적인 젊은이들의 저항문화인 ‘히피(Hippy)’를 다루는 것이 한편으로는 당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리라고 할 수 있다. 히피만큼 하위문화의 상징적인 운동, 삶의 형식도 없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히피만큼 그 용어가 현재까지도 대중소비문화에서 계속 회자되고 조명 받아온 하위문화도 없을 것이다. 덕분에 초기 히피운동의 대표적인 연극 공동체 ‘디거(Digger, 채굴자)’는 1967년에 이미 ‘히피의 죽음’이라는 제목의 행위예술을 진행한 바 있다.
실제로 히피는 1960년대 이후 특정한 명사라기보다는 일종의 형용사와 같이 사용된다. 심지어 필자의 당시 10살 난 아들이 뉴욕 현대미술관에 전시된 폭스바겐 마이크로버스(폭스바겐이 소형 자동차 비틀(beetle)에 이어서 미국에 소개한 type 2 미니밴의 초기 형태)에 새겨진 평화의 표시를 보고서 히피라고 신나해 했던 기억이 있다. 다시 말해서 히피는 젊은, 아니 어린 세대들에 의해서까지 특정한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 이전에 무정부적이고 자유분방한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표현하는 용어로 통용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히피에 대하여 정의하는 것이 쉽지 않다. 더군다나 비평적인 기능을 지닌 아방가르드적인 현대예술과 히피를 연관시켜서 설명하는 일은 더욱 그러하다. 히피의 유명한 ‘사랑의 여름(The Summer of Love)' 이 열릴 당시인 1967년 6월 7일,「타임스」잡지에 실린 기사에서 저자는 히피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히피들: 하위문화의 철학”에서 히피가 갖추어야 할 덕목들을 나열한다. “당신의 일을 하라. 그것을 해야 하는 곳이라면 어디서라던지 혹은 언제든지. 네가 알고 있었던 사회로부터 떠나라. 완전히 떠나라. 네가 접할 수 있는 모든 정상인들의 마음을 흔들어라. 그리고 그들에게 마약이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그들의 관심을 미, 사랑, 정직함, 그리고 즐거움과 같은 것들로 돌려라.” 1) 타임스지는 히피를 신봉하는 젊은이들이 사랑과 평화의 이상주의자들이지만 다른 한편 일하지 않고 마약을 옹호하며 지나치게 낙관적이며 문란한 생활태도(특히 성적 관계)를 지닌다고 소개한다. 물론 타임스의 기사는 히피의 정치적인 측면, 저항적이고 개혁적인 측면을 간과하고 있다. 히피가 기존의 사회가 규정하는 노동, 성의 관념을 부정하는 것도 궁극적으로 서구의 자본주의와 성차별등과 같은 가치관에 저항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타임스의 보도는 과연 히피가 제대로 된 저항운동인지, 하위문화의 특성들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지에 대하여 독자로 하여금 의심하도록 만든다. 실제로 1967년 순전히 무료 이벤트로 시작되었던 ‘사랑의 여름’이 동부로 옮겨 가면서 1969년 8월에 음반 기획자에 의하여 우드스탁(Woodstock) 음악과 예술의 페어가 조직되었다. 물론 시작되기 직전에 일반 대중들에게도 펜스를 개방함으로써 무료로 예술과 문화를 나누었던 히피의 정신이 우드스탁에서도 계승되었다. 하지만 원래 유료로 이벤트가 기획되고 유명 가수들이 초대되고 마찰을 빚는 일련의 과정은 이미 1960년대 말 히피가 하위문화, 혹은 비상업화된 저항문화라고 하기에는 조직화되고 대중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히피는 이후 카펜터스(Carpenters)와 같은 통기타 가수들의 등장, 1970년대 말 디스코 음악을 통하여 꽃을 사랑하고 자연친화적이며 그리고 공동체 의식, 우애 의식을 강조하는 새로운 형태의 대중문화를 등장시키는 데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히피의 지나친 대중화는 결국 히피의 핵심적인 사고들, 예를 들어 무료 음식이나 무료 진료 서비스, 무료 가계와 같이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사회 참여 운동의 면들을 희석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히피와 시각예술의 관계를 논하는 것도 쉽지 않다. 히피가 시각예술보다는 다른 예술적 장르나 매체를 통하여 넓은 대중들에게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의 '하잇 애쉬베리(Haight-Ashbury)'의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된 디거는 팬터마임 그룹이고, 1950년대 말에 뉴욕으로부터 이주해 온 빗(Beat) 시인들을 중심으로 베이 지역에서 발전되어온 샌프란시스코 르네상스(San Francisco Renaissance)의 예들은 연극과 문학에서 각각 발전되어 왔다. 또한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대중음악과 각종 대규모 음악 페스티벌들을 통하여 히피의 메시지가 대중에게 이르렀다.
이러한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예술과 삶의 경계, 문화에서의 우월적인 구도를 허물려는 팝아트의 주요 쟁점들은 히피의 기본 정신에 부합된다. 히피가 부정하였던 인종적, 성적, 그리고 계층 간의 우월과 차별은 문화적인 우월관계에도 해당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히피 또한 어른 문화의 위선과 진지함을 거부한다는 면에 있어서 팝아트 작가들의 발랄한 면모와 상통한다.
또한 역사적으로 히피와 관련된 예술가들은 캘리포니아 팝아트, 혹은 아상블라주 작가들과도 깊게 연관된다. 월리 해드릭(Wally Hedrick)나 월러스 버만(Wallace Berman)과 같은 팝아트 작가들은 이미 1950년대 말부터 샌프란시스코, 빗 시인들과 친분관계를 유지하면서 전통적인 순수예술의 장르를 뛰어넘는 실험을 하여 왔다.
마지막으로 1964-69년까지 히피문화를 시각적으로 알리는 데에 큰 공헌을 한 락 포스터나 앨범 재킷 디자이너들 또한 청소년 만화문화, 서퍼 문화로부터 시작하여 영국의 19세기 프리-라파엘라잇이나 심지어 프랑스의 신고전주의의 이미지나 테마에 이르기까지 대중문화, 대중시각문화나 미술사의 각종 시각적 언어들을 자유롭게 융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캘리포니아 팝아트와 프리-히피 운동: 월리 해드릭과 월러스 버만
“헤드릭은 즐거운 풍자적인 팝아트를 일종의 펑크 아트의 기이한 면모로 변화시키는 데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로버트 아네슨 언급) 2)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한 아상블라주, 캘리포니아 팝아트 작가들은 로스앤젤레스의 페러스 화랑을 중심으로 활동한 서부 팝아트 작가들에 비해서도 상대적으로 덜 미술사에서 다루어져 왔다. 3) 그러나 월리 헤드릭이 디렉터로 일하였던 식스(Six) 갤러리는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히피문화의 선조격인 빗이나 샌프란시스코 르네상스 시인들의 주요한 활동무대였다. 빗의 대표적인 시인인 긴즈버그도 1955년 유명한 “울부짖음(Howl)”의 첫 시낭송회를 식스 갤러리에서 가졌다. 4)
원래 식스 갤러리는 다다의 카바레 볼테르처럼 전통적인 화랑이라기보다는 예술과 문학, 실험 연극을 함께 상연하는 공간이었다. 특히 해드릭은 화랑에서 미국에서는 드문 키네틱 광선쇼를 선보였고 쓰레기나 잡동사니로 예술작업을 만드는 캘리포니아 아상블라주 아트의 전통을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광선쇼는 이후 히피 세대들이 등장하게 되면서 락 공연들에서 선보인 몽환적인 사이키델릭(Psychedelic) 아트로 발전되었다.
유럽의 낭만주의, 초현실주의, 다다 예술과 문학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해드릭의 작업들은 그러나 사회비판적인 면모를 지닌다. 토마스 크로우가『60년대의 봉기(The Rise of the Sixties』(1997)에서도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해드릭의 <성조기(평화)>(1953)는 재스퍼 존스의 1954-55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성조기>보다 앞선 것이다. 해드릭의 문구는 1953년 냉전시대의 시작과 함께 1950년대 초에 계속되었던 핵실험을 비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해 볼 수 있다. 또한 해드릭의 <평화>는 이미 특정한 문구가 샌프란시스코 저항문화에서 아이콘과 같이 자리 잡혀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해드릭이 1967년에 만든 <전쟁룸>은 얼핏 보기에는 동시대에 등장한 미니멀적인 오브제나 개념미술과 연관성을 보이지만 베트남 반전의 명확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저항운동과의 끈을 계속 이어 갔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해드릭은 예술이 사회적인 메시지를 떼어 놓고는 존재할 수 없다는 그의 의견을 분명히 하여왔다. “당신은 반드시 인간으로서의 깊은 생각, 그리고 정치적인 입장을 가져야 한다. 회화란 정치 위에 존재한다. 무엇이던지 영혼과 연관된 것은 용기와 연관된다.” 5)
해드릭의 기이한 외형과 행보 또한 1960년대 젊은 세대들에게 힙스터의 전형으로 여겨졌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노드 비치의 '베스비오(Vesuvios)' 카페에서 검은 색을 입고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는 하였다. 헤드릭의 카페 베스비오에는 이미 1958년 빗 시인, 혹은 샌프란시스코 르네상스의 삶의 형태를 궁금하게 여기는 관광객들로 붐볐었다. 해드릭은 또한 의식적으로 뉴욕 미술계와도 거리를 두고자 하였다. 1950년대 이미 서부 미술계에서는 잘 알려져 있었던 헤드릭의 작업이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16명의 미국인들’(1959)전시에 선택되었으나 그는 전시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였다.
해드릭 만큼이나 기이하면서도 독립적인 삶을 살았던 작가로 월러스 버만을 들 수 있다. 버만은 일찍이 재즈와 실험영화에 경도되었으나 헤드릭과 유사하게 콜라주나 오브제 아트에 심취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는 제대로 된 인쇄기술이나 복사기술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에 수작업으로 '베리팩스(Verifax)'라는 콜라주 시리즈를 제작하였다. 과학기술을 인간주의적인 측면에서 사용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그의 ‘베리팩스’ 시리즈에는 텔레비전 네트웍크를 교란시키는 각종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또한 버만의 문학과 예술 잡지「세미나(Semina)」에는 낭만주의 문학의 근간하여 인간 의식의 해방에 대한 각종 시들과 이미지들이 담겨 있다. 특히 선인장 '페이요테(peyote)'의 예찬론도 등장한다. 페이요테의 즙은 원래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명상을 위한 신경안정이나 마취를 위한 의학적인 용도로 사용하였으며 집중력을 높이고 깊은 명상의 단계로 들어가기 위하여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시인들 사이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히피 문화의 등장과 더불어 무의식의 세계를 강조하였던 초현실주의 시인이나 예술가들과 유사하게 인간의 정신을 집중시킬 수 있는, 사회의 오염된 정신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각종 명상법과 약물(마약)을 이용한 방법들이 강조되었다. 6) )
특히 버만의 콜라주 속에는 당시 빗 세대와 히피 세대를 대변하는 저항적인 인물들이 등장한다. 1965년과 1976년 제작된 <무제> 콜라주들에 등장하는 밥 딜런은(Boy Dylan)은 “Blowin' in the Wind”(“바람만이 알고 있다.”-인종차별), “A Hard Rain's a-Gonna Fall”(“산성비가 내릴 것이다.”-핵의 위험)에서 사회적인 이슈들을 비교적 용감하게 다루어 왔다. 1960년대 중반 밥 딜런은 전통적인 포크송을 모던 락, 재즈 등의 다양한 장르를 접합하였으며 그의 시에 등장하는 자유 연상법이나 우연성(가사를 우연적으로 조합한 단어들로 만드는 수법)을 사용함으로써 고급문학과 대중문화, 오래된 전통과 새로운 변화간의 융합을 시도한 바 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버만의 콜라주는 대안적인 종교, 대안적인 문화의 총 집합체로서 다양한 메시지를 영화 시퀜스과 같이 배열해 놓고 있다.
“가족의 개”: 디자인 공동체와 사이키델릭 포스터
새로운 의식세계와 감각의 발견, 자연으로의 회귀, 기존 사회, 문화, 정치 체제로부터의 이탈, 이러한 기본 개념에 있어서 빗과 히피는 공통점을 지닌다. 하지만 빗이 주로 소규모의 예술가들에 의하여 발전되었다면 히피는 공연예술과 같이 대중을 접하는 예술적 장르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다르다. 히피가 더 많은 대중들과 조우하게 되었고 저항적인 운동의 물결에 합류하는 ‘대중적인’ 하위문화로 발전되게 된 것도 히피적인 성향을 지닌 관객들이 공연예술과 대중문화를 통하여 결집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히피운동과 연관하여 영국의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델에 근간한 ‘디거’를 들 수 있다. 샌프란시스코 히피 거리인 하잇-애쉬버리에 위치한 디거는 단순히 예술가들의 운동이라기보다는 사유 재산을 부정하는 혁신적인 사회정신을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이 내세운 자연으로의 회귀, 지식과 과학기술을 인간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 등등의 강령은 무정부주의적인 히피의 공동 커뮤니티를 이루기 위하여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전후 미국 사회의 쓰레기 문제를 덜어주고, 빈부의 차이나 물질의 궁핍함으로부터 모두를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생겨난 개념은 실은 물건뿐 아니라 예술의 분야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무료 가계 운동에 참여하는 경우 포스터를 소량의 돈으로 기부하면서 가져가게 되고 콘서트나 연주회는 무료로 공유하는 기본 원칙에 따라 운영되었다. 또한 음식은 모두 무료이며 사유재산은 필요한 것들 이외에는 원칙적으로 배제된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디거’ 커뮤니티 내부에서 특정한 개인의 퍼포먼스 보다는 공동체적인 창조물이, 그리고 개인의 순수한 시각적 작업보다는 공동체적이고 기능적인 포스터 엽서, 앨범 재킷들이 활성화 되었다. 이와 연관하여 1960년대 중반 이후 그레이풀 데드(Grateful Dead)의 포스터와 각종 락 콘서트의 홍보물을 디자인한 ‘가족의 개(Family Dog)’그룹을 들 수 있다. 그들의 락 포스터는 1964년 여름에 개최된 ‘사랑의 여름,’ 그리고 3년 뒤인 1967년에 열린 우드스탁 음악 페스티벌을 통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사랑의 여름의 경우 존 필립스의 노래, 샌프란시스코의 “샌프란시스코에 가려면 반드시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가사에 등장하는 꽃이나 자연의 모티브들은 히피의 가장 대표적인 시각적 상징물이 되었다.
스탠리 마우스(Stanley Mouse)와 안톤 켈리(Anton Kelly)는 당시 가족의 개라는 음악 프로덕션 회사의 소속으로서 1960년대 말 히피와 연관하여 각종 락 콘서트의 포스터, 특히 사이키델릭한 락 음악에 상응하는 포스터로 잘 알려져 있다. 사이키델릭 음악은 이전의 락이나 포크음악의 화음을 무시하고 강한 바이브레이션으로 몽환적인 효과를 만들어 내는 음악적 스타일에 해당한다. 마우스와 캘리의 포스터에서 특유의 강렬하고 신비로운 색상과 움직이는 듯이 구불거린다. 특히 아르 데코를 연상시키는 장식적인 테크닉, 죽음과 허영 등의 상징주의적인 소재와 테마를 주로 사용하는 마우스와 켈리의 포스터는 미래주의적이면서도 노스탈직한 성향을 띠고 있다.
마우스와 켈리가 인용하는 예술과 문화의 범위는 그야말로 다양하다. 2007년 일간지「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an Francisco Chronicle」과의 인터뷰에서 켈리는 미술사의 고상한 이미지로부터 대중소비문화, 상품의 패키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미지들을 인용하였다고 설명한다. 7) 유명한 언더그라운드 만화 작가 로버트 크럼(Robert Crumb)을 연상시키는 과장된 선묘 수법과 기묘한 색상 배합은 초현실주의 작가인 달리가 실현한 것과 유사한 편집광적인 비평방법의 상태, 몽환적인 상태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유명한 크레이트풀 데드의 포스터에 등장한 해골과 장미 이미지는 이후 그들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8)
1960년대 이후의 히피(들)
“칸터의 카페테리아에 오는 히피들에 대한 나의 인상은 그들이 기성세대가 여기는 것만큼 나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그들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만큼 특이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여느 남부인들 만큼이나 편견에 둘러싸여 있다.... 개성을 그들은 의상, 약, 헤어스타일, 말투, 그리고 신념에 있어서 특정한 신앙적 수준의 열정에 [실은] 순응적이기 때문이다.” 버트 프리루트스키 9)
1960년대 중반부터 말에 이르기까지 히피는 나이 어린 청소년 세대들에 의하여 모방되거나 매력을 잃은 놀림감이 되었다. 또한 히피는 급속도로 대중문화에서 인용되었고 1970년대 패션에서 히피식의 주름 염색, 꽃무늬, 평화의 문양이 빈번하게 등장하였다. 1970년대 말을 풍미하였던 디스코 음악의 많은 가사들도 히피 시대의 공동체적인 이상향을 연상시킨다. 1970년대 초 할리우드를 비롯한 대중문화 또한 냉소적이거나 자연 친화적으로 흐르게 되었다.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Bonnie and Clyde)’ (1967), '스팅(Sting)' (1973)과 같은 영화는 사회의 정의에 대하여 냉소적이며 ‘택시 드라이버(Taxi Driver)’ (1976), ‘디어 헌터(Deer Hunter)’ (1978)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메시지는 더 이상 히피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또한 히피의 중요한 철학은 1970년대와 1980년대, 그리고 다양한 예술적 장르에 걸쳐서 계승되었다. 대표적인 히피 건축가 공동체인 ‘앤트 팜(Ant Farm, 개미굴)’은 원래 자동차들을 텍사스 사막 한 가운데 거꾸로 처박아 놓은 설치 작업으로 유명하다. 이제까지의 방식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즉 인간을 위하여 과학기술을 사용하여야 한다는 신념에서 나온 일종의 제스처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히피적인 사고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는 캘리포니아 알타몬트(Altamont)에 지어진 파빌리온을 들 수 있다. 집 전체를 ‘베개’라고 부르는 프로젝트로부터 근거한 이 구조물은 풍선이나 텐트와 같이 견고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부분으로서 자연의 움직임을 그대로 반영하는 집의 형태를 염두에 두고 있다. 게다가 집의 내부에 칸막이가 없어서 구성원들이 모두 함께 사는 히피적 커뮤니티의 정신이 그대로 반영된다.
앤트 팜과 같이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 대지예술의 많은 작가들도 결국 히피식의 자연친화적인 사고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과학 기술을 보다 로맨틱하고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려는 입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연 그 자체로 돌아가려는 염원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연관하여 영국의 리처드 롱의 <걸어서 생긴 라인>(1967)을 예로 들 수 있다. 여기서 자연을 걷는 단순한 행위는 히피 등에 의해서도 실행되어 왔으며 특히 히피들은 단체로 자연의 돌 (더욱 유명한 것은 인도의 갠지스 강의 돌과 같은 것들)을 주고받아 왔다. 자연의 매우 단순한 재료인 돌을 그대로 사용하고 자연에 직선을 그으면서 맨발로 걷는 행위는 ‘소박한 삶’을 표방하는 히피에 의하여 1960년대 말에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1980년대 마이크 켈리의 수공예적인 인형작업을 히피와의 연관성 속에서 언급하고자 한다. 켈리는 인터뷰에서 수공예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수공예 작업의 불가사의한 아우라는 시간과 연관되어 있다. 수공예는 청교도적인 자세로 열심히 일한 것, 그대로를 반영한다.... 그리고 이 오브제들의 상당히 감정이 투영된 특성은 그들에 [반비례하는] 물질적인 특성 때문에 심화된다. 싸고 저급한 본 재료를 훨씬 능가하는 그들의 감정적인 무게의 관계가 모순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10)켈리의 이와 같은 발언은 1980년대 네오 팝아트, 혹은 상품아트(Commodity)라고 불리는 제프 쿤스의 오브제 작업에서 상품의 본래적인 가격과 예술작업의 경제적인 가치 사이에서 파생하는 모순점을 작가가 그대로 이용한 것에 대하여 반기를 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켈리의 수공예에 대한 언급은 모든 것이 경체적인 지표와 가치로 환원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은 아날로그적인 감수성을 상기시킨다. 물론 히피는 청교도적인 노동의 중요성을 부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축약될 수 없는 가치들을 이상화하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켈리의 작업이 히피들이 선호하였던 중고품과 같은 외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히피의 영향을 지적해 볼 수 있다. 히피들은 중고품의 재활용을 통하여 상품에 대한 수요가 기업들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수많은 쓰레기가 쏟아져 나오는 현실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현대 예술에서도 이와 같이 이전의 물건을 재활용하고 벼룩시장을 프로젝트로 기획하는 일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안양의 대리보충공간 ‘스톤앤워터’에서는 입주 작가들과 인근 시장 주민들 사이에서 다양한 형태의 물물교환이 일어난다. 히피처럼 이상화된 공동체는 아니더라고 점차로 전지구화에 대하여, 일상 삶의 상업화에 대하여, 소비문화의 획일성에 대하여 대안적인 사회적 네트워크를 조성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대안 미술공간들에서는 전시와 연관하여 벼룩시장 프로젝트들이 소개된다. 동네의 주민들과 소규모의 상인들이,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만나고 소통하는 장이 벌어진다.
결국 히피에 대한 평가는 히피에 대한 두 가지 정의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꿈을 향한 이상향, 혹은 단지 반사회적인 긴 파티였는지 아니면 생산적이고 구체적인 정치적, 사회비판 운동이었는지, 서로 다른 히피에 대한 정의가 가능하며 평가도 이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긍정적인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히피의 공동체가 주장했던 자연환경과 같은 이슈들은 아직도 살아 있다. 또한 미술사에서 빗 시대의 아상블라주 작업이나 저급 청소년 만화 형식으로부터 유래한 락 포스터가 아직 미술관에 입성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히피가 완전히 기득권 체제로 편입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히피가 대중소비문화의 중요한 아이템이 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켈리의 중고품을 연상시키는 인형들, 뜨개질과 같이 히피적인 물건들이 아무리 미술관 바닥에 놓여 있다고 해서 반미학이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나아가서 1990년대 중고품 시장의 옷 (디자이너의 표현을 빌리자면 할머님이 만들어주셨던 패션)을 재활용한 마크 제이콥스(Marc Jacobs)는 루이 비통의 수석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히피 스타일이 최고급 패션 브랜드의 대표적인 ‘룩’으로 여겨지는 데 있어 손색이 없음을 증명해 보였다. 복스 바겐도 히피 세대의 향수를 달랠 수 있는 마이크로버스의 새로운 버전을 출시 준비 중이다. 모든 하위문화가 다 그러하지만 히피는 하위문화가 어떻게 새로운 상업문화로 바뀌고 그러나 시대에 따라서 계속적으로 재해석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다양한 가능성과 한계점들을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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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he Hippies: The Philosophy of a Subculture,"Times, 7 July, 1967; 인용 Myron A. Marty, Daily life in the United States, 1960–1990 (Westport, CT: The Greenwood Press, 1997), p. 125.
2) Suzaan Boettger, "San Francisco Chronicle, Painting, From Raunchy To Cotton Candy," San Francisco Chronicle, 1 July, 1982.
3) 예외적인 연구로는 Rebecca Solnit, The Secret Exhibition: Six California Artists of the Cold War Era (San Francisco, CA: City Lights Books, 1991) 이 있다. 여섯 작가(Wallace Bergman, Jess, Bruce Conner, Jay DeFeo, Wally Hendrick, and George Herms)는 대부분 추상표현실주의적인 붓자국이나 표현을 간직하면서도 주로 아상블라주를 사용하는 캘리포니아 팝아트의 전형적인 작가들이다.
4) 긴즈버그를 비롯하여 동부의 젊은 시인들이 1950년대 말 샌프란시스코에서 정착하면서 시작된 샌프란시스코 르네상스는 이후 샌프란시스코의 베이 지역을 중심으로 자유분방한 예술문예 운동을 일으켰고 긴즈버그는 1967년 히피 문화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인 골든게이트 공원의 집회 ‘human be-in(인간 하나가 되다)’에서 미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반정부적이고 사회의 각종 규범에 반하는 삶을 옹호한 바 있다.
5) 인용, Peter Selz and Susan Landauer, Art of Engagement: Visual Politics in California and Beyond,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CA: 2006), p. 89.
6) 마약을 통하여 혹은 다른 명상의 방법을 통하여 새로운 의식의 단계에 이르고 이와 같은 상태를 예술적 창작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노력은 이미 실험예술에서 다양하게 시도되어져 왔다. 그러나 1960년대 마약을 정서적, 예술적, 정신적으로 유효하며 생산적인 것으로 적극적으로 옹호한 대표적인 인물로 한때 하버드 교수였으며 심리학자인 티모시 리어리(Timothy Leary)를 빼 놓을 수 없다.
7) “그러나 우리는 아예 더 나아가서 미국 인디언 이미지, 중국 이미지, 아르 누보 이미지, 아르 테코, 현대, 바우하우스까지 무엇이든 인용하였다.” 인용, Patricia Sullivan, “Alton Kelley, 68; Graphic Artist With a Flair for the Psychedelic,” Washington Post 3 June, 2008;http://www.washingtonpost.com/wp-dyn/content/article/2008/06/02/AR2008060202725.html
8) 1966년 제니스 조플린이 참여하고 있는 빅밴드와 홀딩 컴패니(Big Brother & the Holding Company)의 포스터에는 지그-재그 담배 회사의 선전이 등장하는데, 마약과 히피문화의 상관성을 암시하는 위한 것으로 해석되고는 한다.
9) 인용, Danny Miller, “Obsessed with the Sixties—Part 2: Come On People Now, Smile On Your Brother,”; http://dannymiller.typepad.com/blog/2007/02/come_on_people_.html
10) Mike Kelley, Minor Histories: Statements, Conversations, Proposals, ed. John C. Welchman (Cambridge, MA: MIT Press, 2004), p.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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