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 건들지 마라!: 시카노 하위문화와 아스코

고동연 (미술사가)

 

시카노 vs. 라스큐아키스모
"라스큐아키스모: 시카노 감수성(Rasquachismo: A Chicano Sensibility)"(1991)의 저자 토마스 이바라-파우스토(Tomas Ybarra-Fausto)는 미국 캘리포니아 남서부에 이주해온 멕시코 태생의 미국인들을 지칭하는 시카노
1)의 문화를 1964년 수잔 손탁의 고전인 캠프(camp)에 빗대었다. 2) 라스큐아키스모는 번역하자면 쓰레기 같은, ‘보잘 것 없는,’ ‘아무것도 아닌’ 이라는 뜻을 지닌 스페인어의 형용사이다. 이바라-파우스토가 라스큐아키스모에 주목하게 된 것도 시카노의 감수성이 캠프와 같이 지나치게 과장되고 키치적이며 무엇보다도 스타일에 집착하며 자기 과시적이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이바라-파우스토가 설명하고 있는 ‘라스큐아키스모’의 개념과 시카노의 정체성은 손탁의 글에서 캠프와 동성애만큼이나 모호한 관계에 놓여 있다. 손탁이 캠프를 동성애 문화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은 것으로 설명하였고 이바라-파우스토 또한 ‘라스큐아키스모’의 개념과 ‘시카노’ 정체성사이에 거리를 둔다. 물론 여기서 이바라-파우스토가 손탁만큼 정체성의 문제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긴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바라-파우스토가 라스큐아키스모를 캠프에 빗댄 것은 결국 호전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시카노’라는 용어와 ‘라스큐아키스모’를 분리시키고 ‘라스큐아키스모’의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60년대 멕시코 인디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시카노라는 용어는 히스패닉이나 라티노와 같은 인종적 정의로부터 벗어나서 스스로의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정체성을 부각시키고 고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동성애 운동의 역사에서 퀴어(queer)가 1960년대 말부터 보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사용된 것과 비교될 만하다. 특히 1960년대 말 흑인 인권운동에 영향을 입어서 일어난 시카노 학생들의 1968년 ‘수업 보이콧트(Chicano Blowout),’ 시카노의 대표적인 공공예술운동인 ‘농민노동자 극단(El Teatro Campesino, 1964-88),’ 그리고 디에고 리베라를 연상시키는 각종 벽화 운동은 이후 1980년대와 1990년대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일어난 공공예술의 한 중요한 축을 형성하여 왔다.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시카노 운동이 시카노의 문화의 자부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라스큐아키스모는 백인의 문화권이나 언어권, 그리고 전통적인 시카노의 문화권이나 언어권과 모두 거리를 두어 왔다. 시카노 중에서 청소년이나 거리의 젊은이들을 지칭으로 하는 파쵸스 (Pauchos 번역하면, 문제아, 혹은 펑크족)를 중심으로 빈번하게 발견되는 라스큐아키스모적인 감수성이란 기득권 문화나 타자화된 문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일종의 2세대 이주 문화를 통하여 가장 잘 드러난다. 라스큐아키스모의 단어도 특정한 문화에 반대된다기 보다는 주로 ‘모자란’ 못 미치는(less than)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전통적인 시카노 문화예술 운동이 보다 민족적 정체성, 정치적 정체성에 더욱 안주한다면 라스큐아키스모는 문화적 언어적 성향에 있어서 훨씬 더 혼용적이다.

 

1930년대 주트 수트(zoot suit)로부터 시작하여 1960년대 갱스터 문화, 그리고 1960-70년대 서구의 개념, 팝아트, 행위예술에 영향을 받은 아스코(Asco 구토, 1972-87)와 같은 예술가 공동체의 경우 의식적으로 스스로를 시카노 세대의 계몽적이고 반소비주의적인 문화로부터 분리시켜 왔다. 대신 라스큐아키스모의 감수성을 지닌 시카노의 젊은이들은 멕시코 문화의 원류를 찾아 헤매지도 그렇다고 전적으로 백인문화에 동화되지도 않는다. 대신 백인의 기독교 문화와 인종차별의 현실로부터 생존하기 위하여 중간자적인 입장을 취한다. 결과적으로 이바라-파우스토가 규정하는 바와 같이 라스큐아키스모는 혼용적이고 이중 언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무엇보다도 유머러스하다. 그리고 그들의 유머는 “경외감을 가지고(Cons Safos)”(의역하면 ‘건드리지 말라’는 뜻)라는 유명한 문신의 어구처럼 자기과장과 자기 폄하를 오가게 된다. 즉 아버지 세대로부터도 분리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인 사회에도 흡수될 수 없는 시카노 젊은이들의 생존전략이 라스큐아키스모인 샘이다.

 

라스큐아키스모의 ‘원조’: 주트 슈트와 최초의 시카노 하위문화
1980년대부터 연구의 소재로 다루어져 온 하위문화는 주로 저항적인 의도를 지닌 소수 집단이 스타일에 대하여 집착하게 되는 사회적 현상을 일컫는다. 하위문화가 패션과 연관되거나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스타의 이미지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30년대 히스패닉 젊은이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되고 점차로 흑인 커뮤니티, 마피아와 같이 이태리의 갱단으로 번져나간 주트 슈트가 하위문화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어깨에 뽕이 한껏 들어가고 허리 위를 덮을 만큼 길고 통이 넓은 바지에 굵은 금줄이 긴 재킷 아래로 나오는 주트 스타일은 흔히들 말하는 ‘양아치’ 양복 스타일이다. 원래 재즈 뮤지션들이나 시카고 갱단의 양복 스타일이 1930-40년대를 거치면서 멕시칸계통의 젊은이들 사이에 엄청나게 인기를 얻게 되었고 주트 슈트로 발전되면서 시카노 젊은이들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주트 슈트의 디자인은 백인 소비문화에 대한 시카노 젊은이들의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주트 슈트는 완벽하게 기득권층인 앵글로-섹슨 민족의 양복을 그대로 빼닮고 있다. 긴 기장은 턱시도를 연상시키며 거대한 모자는 최대한 격식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펑퍼짐한 바지의 통과 과장된 신사모의 챙은 백인의 양복을 과장해서 해석하고 있다. 게다가 주트 슈트는 싸구려 옷감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색상과 무늬가 화려한 경우들이 많아서 그야말로 천박해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1930년대 공황과 1940년대 전쟁준비 때문에 근검절약을 강조하고 있던 시기에 등장한 주트 슈트는 한편으로는 시카노 젊은이들로 하여금 백인의 양복을 차용하면서도 단순하고 검소한 앵글로 섹슨 문화로부터 스스로들을 분리하는 수단이 되었다. 실제로 백인 경찰관들이 주트 슈트를 입은 청소년들을 선도의 대상으로 삼아오면서 이에 반발한 젊은이들이 1943년 주트 슈트 폭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3)

 

원래 시카노인들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예술 저항운동이 등장하게 된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농민노동자 극단’이나 벽화운동을 통해서였다. 1978년에 공동체적인 예술그룹(Common Arts)에 의하여 완성된 샌프란시스코의 라 페나 문화센터(La Penna Cultural Center)의 경우에서와 같이 벽화 속 이미지들은 시카노 인들의 뿌리와 역사적인 자긍심을 고조시키려는 계몽적인 목적을 갖는다. 특히 농민노동자 극단에서는 멕시코 문명의 근원에 해당하는 아즈텍 문양을 모방한 표시를 일종의 대안적인 국가의 상징과 같이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대부분 중미나 남미에서 이주한 시카노인들이 고국에서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경험하였고 그들의 예술도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형식을 띠게 되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시카노 젊은이들의 문화는 시카노에 대한 자긍심이나 노스탤지어보다는 그들의 이중적인 문화적, 종교적, 언어적 환경에서부터 출발한다. 1940년대 주트 수트로부터 1960년대 이후 갱스터 문화에 이르기까지 시카노 젊은이, 즉 파쵸스의 하위문화는 기득권의 소비문화, 대중문화, 그리고 영어와 자신들의 사회적, 문화적 위치를 끊임없이 재고하는 과정이어 왔다. 시카노의 청소년들은 백인의 기득권층 문화로뿐만 아니라 멕시코의 전 세대의 문화로부터도 소외된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시카노 청소년들에게 결국 아즈텍과 같은 이상향을 찾는 일은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거나 원하지 않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주트 수트의 원형이 미국과 멕시코의 경계선에 위치한 지역의 바리오(시카노만이 사는 한정된 구역이라는 의미에서 게토와 유사)에서 유래하였다는 소문 또한 이와 같은 문화적인 지평을 잘 반영해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시카노 청소년들에게 영어는 매우 상징적이면서 실질적인 고민의 대상이 되어 왔다. 대부분 영어를 쓰지 않는 가정으로부터 온 시카노의 청소년들에게 영어는 그들이 일차적으로 기득권 사회 체계에 적응하고 편입하기 위한 필수적인 수단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스페인어 대신에 영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시카노의 청소년들에게는 전적으로 그들의 부모를 부정하고 백인 계층에 야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영어를 통하여 외향적으로는 미국인이 될 수 있지만 그로 인하여 인종적, 문화적 차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어와 스페인어의 이중적 언어 현실을 통하여 시카노 청소년들에게 두 문화로부터 모두 소외된 그들의 처치와 동시에 불확실한 미래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저항해야만 한다. 다음 장에서 언급하게 될 작가 공동체 아스코의 리더 해리 갬보아 주니어(Harry Gamboa Jr.)가 영어를 인종차별의 도구이자 동시에 극복의 대상, 새로운 생존전략의 수단으로 인식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갬보아 주니어에 따르면 “영어는 내가 적응해야할 것이었지만 동시에 나를 [인종차별로부터] 보호하는 수단이자 나의 공격 수단이었다.” 4)

 

이바라-파우스토 또한 라스쿠아 시스모의 두 번째 특징으로 주로 언어를 이용하여 생겨나는 변형과 변질, 그리고 이로부터 파생되는 유머를 꼽는다. 동유럽 라인강 지역에서 10세기부터 유태인들이 거주하면서 독일어와 자신들의 언어를 혼용시켜 만든 이디시(Yiddish)나 중미의 자마이카 지역을 중심으로 영어와 서부 아프리카어로 혼합된 코레올어(creole)와 같이 시카노 젊은이들인 파쵸스는 완벽한 영어를 구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스페인어에서 유래한 단어들을 고수한다. 바퀴벌레와 같은 일상용어들로부터 특정한 일반 형용사에 이르는 파쵸스의 언어사전에는 일반적으로 기득권 백인 문화에 맞서는 초연한 모습이 강조된다. 스포츠카를 탈 수 없는 시카노 젊은이들이 나름대로 오래된 자동차를 개조해서 다닌다는 의미에서 시카노 젊은이들을 일컫는 신조어로 로우 라이더(low rider)가 있다. 또한 그들이 선호하는 스페인어와 영어의 혼합용어는 주로 거칠고 원색적이다. 말크리아도(malcriado)는 ‘내용이 나쁜,’ ‘빈약한’이라는 뜻이고 펠라도(pelado)는 ‘돈이 한 푼 없는 선착장의 인부’라는 뜻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무엇보다도 미국 사회에서 철저하게 타자화된 자신들의 처지로부터 적어도 외형적으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강렬한 자아상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콘 사포스 또한 원래는 존경을 표하라는 명령을 의미하지만 결국 스스로에게 존경을 표하라는, 즉 함부로 건들지 마라라는 뜻으로도 통용된다. 콘 사포스는 한편으로는 공손하면서도 공격적이고 자기 과장과 자기 폄하의 다중적인 의미를 담는다. 주트 수트의 지나치게 과장된 뽕이 달린 어깨, 모자의 챙, 맹수, 해골과 함께 마리아가 새겨진 갱스터의 문신 등은 파쵸스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기득권 문화에 대한 그들의 저항과 두려움을 동시에 암시한다. 그것은 생존전략으로서의 청소년 하위문화가 지닌 이중적인 속성과도 연관된다.  

 

시카노 젊은 작가 공동체: 아스코 (1972-87)
“우리 작품을 보았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의 반응이 그러했어요. 구토가 난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구토, 스페인어로 아스코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해리 갬보아 주니어, 2010) 
5)

 

아스코는 1970-80년대에 동쪽 로스앤젤레스 시카노 커뮤니티에 속한 젊은 작가들로 이루어진 작가 공동체이다. 해리 갬보아 주니어와 함께 원리 헤론(Willie Herron III), 팻시 발데즈(Patssi Valdez), 크롱크(Gronk, 혹은 Glugio Nicandro)의 4명으로 구성된 아스코는 당시 서구 저항미술이나 좌익 미술이론에 능통하면서도 시카노 커뮤니티 내부의 젊은이들의 고민을 표출해내었다는 면에서 미술사적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스코를 알리게 된 계기는 1972년 ‘간섭(intervention)의 한 전략으로 아스코의 일원들이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의 벽 위에 자신의 이름을 낙서로 남겨 놓은 '스프레이 페인트 라크마’ 이벤트를 통해서였다. 1960년대 말부터 지속되어온 미술기관 비판(institution critique)과 거리의 미술인 낙서가 만나는 순간이다.

 

아스코의 작가들에게도 영어, 그리고 서구 기득권의 미술이나 미술계는 그들이 적응해야하는, 그러나 동시에 저항해야하는 수단이어 왔다. 갬보아 주니어와 발데즈에 따르면 1960-70년대 동쪽 로스앤젤레스는 그야말론 혼돈의 장소였다. 매일 밤낮으로 갱단과 반전운동이 시카노 커뮤니티에서 일어나게 되면서 스스로를 거리로부터, 동시에 기득권 백인문화로터 지키는 방법은 자신들만의 잡지를 발행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1970년부터 젊은 작가들의 글과 이미지를 닮은 영어와 스페인어로 된 잡지「부활(Regeneracion)」을 만들었다.

 

실제로 아스코의 멤버인 헤론이 만든 벽화에서 <라 페나 문화센터>에서와 같이 사실주의 리얼리즘적인 표현과 시카노 역사를 재현하려는 계몽적인 메시지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대신 벽화에는 영어와 스페인어로 되어 있는 낙서가 함께 등장한다. 버려지고 금이 간 벽 위에 그려진 헤론의 벽화는 시카노 벽화와는 달리 일종의 나레티브를 구성하지도 특별한 역사적 이벤트를 재현하고 있지도 않다. 헤론의 작업에는 농민 봉기의 역사 대신에 검게 칠한 화면 위로 삐에로의 얼굴이 등장한다. 삐에로는 대부분 노동자계층이었던 시카노인들이 즐겨 보는 서커스에 자주 등장한다. 텐트에서 일어난다고 하여 스페인어로 ‘카르파(carpa)’라고 불리는 유랑극장이 그들의 주요한 오락 수단이다.

 

헤론은 자신의 벽화를 1960-70년대 좌익 미술이론가들이나 작가들이 흔히 사용하던 ‘도시의 간섭(urban intervention)’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당시 아스코 작가들은 1960년대 말 새로 신설된 소수인종을 위한 프로그램 (Equal Opportunities Program)을 통하여 미술학교나 미국대학에 재학할 수 있게 되었고 기관비평 이론들이나 유럽의 미술비평을 수용하게 되었다. 원래 ‘도시의 간섭’이란 1950년대 말부터 특정한 줄무늬를 몸에 두르고 파리의 시가지를 돌아다니는 행위예술가이나 설치예술가들의 주요한 미학적 책략이다. 하지만 헤론의 간섭은 일반적으로 더 잘 알려진 1960년대 프랑스 좌익계통의 다니엘 뷔렝식의 작업에서와 같이 평온한 거리에서 일상을 되돌아보고 경각심을 갖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단순하고 현학적인 미니멀작업이나 기관 비평과 연관된 개념적인 설치 작업들과 달리 헤론의 작업의 방식과 소재는 시카노 청소년들이 자주 보는 삽화나 만화를 연상시킨다. 헤론은 그림을 그릴 당시 갱에게 습격을 받고 피를 흘리면 응급실로 실려 간 동생을 생각하면서 금이 간 건물의 틈새로부터 상처받고 튀어나오는 인물들을 그렸다고 설명한다. 6) 뷔랭의 작업에서 ‘간섭’이 더 개념적이고 비평적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라면 헤론의 간섭은 말 그대로 폭력과 갈등의 본산지인 도시 슬럼가에 치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실제적이고 상징적인 의미에서 삶의 현장과 직결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아스코 작가들은 행위, 설치, 개념 미술의 서구적인 아방가르드 책략을 사용하면서도 동시에 시카노 커뮤니티의 시각문화를 지속적으로 반영하여 왔다. 성탄절 이브나 걸어 다니는 성인들의 모습을 하고서 <걸어 다니는 벽화>(1972)는 반전운동, 서구의 행위예술, 관객참여 예술, 시카노의 전통 문화, 그리고 시카노 벽화운동과 다양한 방식으로 관련을 맺고 있다. <걸어 다니는 벽화>는 계몽적이고 교육적인 시카노 벽화 운동을 직접적으로 풍자한다. (아스코는 또한 발데즈 자체를 테이프로 벽면에 붙여놓고 이를 벽화라고 명명하는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또한 성탄절 이브날 흔히 하던 시카노의 전통 축제가 결렬되자 베트남 군인을 파견하는 지역센터 앞에서 벌어진 <걸어 다니는 벽화>는 시위의 성격도 띠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걸어 다니는 벽화>(1972)에서 눈길을 끄는 부분은 아스코의 작가들이 시카노의 전통적인 성탄절 퍼레이드를 해석하는 방식이다. 예수님의 역할을 맡은 갬보아 주니어는 십자가를 메고 걸어 다니고 발데즈는 히스패닉 문화의 성녀인 우리의 관달루프 여인(Nuestra Señora de Guadalupe)로 변장한다.『가장 전형적인 아방가르드: 로스앤젤레스의 소수 영화의 역사와 지형도 (The Most Typical Avant-garde: History And Geography Of Minor Cinemas In Los Angeles)』(2005)의 저자인 데이비드 제임스에 따르면 중남미의 마디그라를 연상시키는 그들의 복장은 아스코 작가들이 어려서부터 보고 자라온 전통적인 종교, 문화적 행사를 재현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성녀로 둔갑한 발데즈의 모습은 성스러운 관달루프 여인보다는 우스꽝스러운 (혹은 동성애 퍼레이드에 나오는) 과장된 광대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7) 게다가 지나치게 과장된 화장과 의상은 이바라-파우스토가 지적한 라스큐아키스모, 혹은 캠프의 전형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아스코의 작업들은 이와 같이 시카노 문화와 기득권 백인의 아방가르드 문화 사이를 배회한다. 특히 워홀이나 셔먼의 작업을 연상시키는 1970년대 아스코의 영화나 행위예술 작업들은 할리우드 문화나 대중매체를 통하여 점차로 인지도를 쌓아가기 시작한 시카노인들의 정형화된 모습을 풍자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 진다. 워홀의 1969년 스크린 테스트를 연상시키는 아스코의 <노-무비스>는 원래 영화를 만들 자본이 없었던 아스코 작가들이 일반 필름으로 이미지들을 찍은 후에 직접 사람들에게 우송하는 매우 특이한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이후에도 아스코 그룹은 ‘노-무비’라는 타이틀로 여러 편의 시리즈를 완성하였다. <노-무비tm>시리즈에서 아스코 작가들은 전형적인 히스패닉의 갱단을 연상시키는 의상을 입고 등장한다. 혹은 러시아 구축주의 영화 오데사의 스텝을 연상시키는 계단 장면에서 피를 흘리면서 길거리에 버려진 남성의 모습은 히스패닉 갱단의 최후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포장하고 있다. 아예 1974년에 만들어진 노 무비스 시리즈에서 발데즈는 에미상이나 아카데미상을 연상시키는 복장과 배경에서 ‘노-무비’ 상을 직접 수여 받는다. 그리고 거울이 달린 배경에서 자신의 모습을 몽환적으로 바라보는 발데즈의 모습은 1920-30년대 전설적인 매우 마를린느 디트리히를 연상시킨다.

 

아스코의 문화적인 원천은 이와 같이 다양하다. 그것은 개신교와 가톨릭을, 할리우드와 할리우드 짝퉁에 해당하는 시카노식의 대중문화를 총망라한다. 아스코 작가들은 버려지고 부서진 건물의 벽면에 낙서와 같은 벽화를 제작하거나 시카노의 전통적인 퍼레이드들을 재현해 낸다. 하지만 그들이 결코 전통에 대한 경외나 재생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대신 아스코의 작업들은 라스쿠아키스모에 대한 중요한 정의에 해당하는 시카노 아버지 세대의 문화와 백인의 기득권 문화권 사이에서 2 퍼센트 모자란(less than) 혼용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시카노의 바리오를 넘어서서: 시카노 하위문화에서 마돈나로
1970-80년대 로스앤젤레스의 동쪽에 위치한 시카노 커뮤니티 출신 작가들의 작업에서 유독 할리우드 배우들의 이미지나 소위 갱 영화에 주로 등장한 정형화된 시카노인의 모습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로스앤젤레스의 시카노 커뮤니티 지역은 할리우드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층적으로 문화적으로 할리우드는 시카노 커뮤니티의 젊은이들에게는 머나먼 세상이어 왔다. 발데즈의 <노-무비스>에 등장하는 성적으로 조숙한 이미지는 시카노 커뮤니티의 여성들이 동경해 온, 그리고 이후 할리우드에 진출한 짝퉁 여배우들을 통하여 생산해 내온 이미지이기도 하다.  

게다가 시카노 청소년 여자아이들에게 할리우드식의 성문화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매일 미사에 참석하고 베일을 쓰는 시카노 커뮤니티의 여자아이들은 보수적 성관념과 모순되게도 참혹한 거리의 성문화에 동시에 노출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시카노의 10대 여자아이들에게 할리우드의 성문화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자유와 경제적인 안정을 동시에 약속하는 것이어 왔다.

 

1980년대 말부터 설치작업을 진행하여온 대표적인 시카노 여성 예술가 아말리아 메사-베인스(Amalia Mesa Bains)는 <리오강의 돌로레스 리오를 위한 알타>(1988)라는 작업에서 여성의 성적 의미가 지닌 이중적인 기준을 다룬다. 시카노 여성들이 자신들만의 공간으로 꾸며 놓은 종교적인 알타, 혹은 ‘도메스티카나(domesticana)’에는 신과 함께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들이 총망라되어있다. ‘도메스티카나’는 신을 모시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화려한 커튼이나 여배주의 모습에서와 같이 시카노 여성들의 다양한 욕구와 염원이 표출되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서 여성 개인의 공간인 ‘도메스티카나’는 일상성 속에서 예술을 만들어내고 미국의 대중소비문화를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해내는 시카노 여성들의 창조성을 엿보일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경배의 대상으로 함께 전시된 여성들의 흑백사진은 지나치게 포장되고 구태의연한 여성성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레즈비언이기도 한 메사-베인스가 선보이고 있는 도메스티카는 지나치게 장식적이고 키치적이서 성스러움보다는 관객으로 하여금 오히려 욕망의 덧없음을 인식시켜 준다.

 

물론 최근에는 시카노 커뮤니티의 대중문화가 지나치게 화려하고 키치적인 기득권의 할리우드로 파고들고 있다. 1988년 영화 <라 밤바>를 시작으로 1990년대 가수 리키 마틴이나 배우 제니퍼 로페즈의 성공은 라티노의 대중문화가 이제 더 이상 할리우드 짝퉁이 아니라 할리우드 주도적인 영역으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인종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계층적으로 차별 받아와야 했던 시카노 젊은이들의 생존전략에 해당하는 하위대중문화가 1980년대 들어서 서서히 미국 대중문화의 부분으로 수렴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시카노 여성의 성적 이중성은 마돈나의 1985년 <처녀처럼>의 노래와 뮤직 비디오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교회의 도덕적 규범에 의하여 묶이고 그러나 동시에 지나치게 거리의 조숙한 성문화에 노출되어 있는 이중적인 상황이 고스란히 마돈나의 행보에 반영되었고 1980년대 중반 인기와 논쟁을 동시에 이끌어 내었다. (물론 마돈나 자신도 엄격한 가톨릭 이탈리아 이민과 노동자 계층에서 자라났다.)

 

하지만 히스패닉의 갱스터 문화, 성문화, 문신문화, 랩 문화가 진정으로 시카노 지역 내에서 계속되는 갱스터 문화의 위험성과 인종차별의 현실을 진정시켜주지는 못한다. 뉴욕 브롱스 남부에서 사회봉사자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페핀 오소리오(Pepin Ossorio)는 마약과 범죄로 얼룩져진 시카노 부자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오소리오의 <영예의 계급장>(1995)은 범죄로 인하여 타자화된 아버지상과 시카노의 남성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오소리오의 남성상은 폭력이 난부하는 시카노 사회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백인에 의하여 타자화된 자신의 남성성을 실은 숨기기 위하여 각종 맹수의 이미지와 성녀의 이미지들을 문신으로 새겨 넣는 갱스터들을 연상시킨다. 건들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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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카노라는 명칭은 일반적으로 멕시카노의 발음이 변형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정확한 유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반면 1960년대 이후부터 시카노는 히스패닉이나 라티노에 비하여 정치적인 자의식을 가진 멕시코 출신의 미국인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970년 시카노 운동당시 최루탄에 맞아서 숨진 루벤 살라자르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실린 “누가 시카노인가?”라는 기사에서 시카노를 “반앵글로적인 미국인 이미지를 발견하는 멕시코 출신의 미국인이다”라고 규정한다. Ruben Salazar, "Who is Chicano? And What is it the Chicano Want," Los Angeles Times, 6 Feb. 1970.

2) Tomas Ybarra-Frausto, "Rasquachismo: A Chicano Sensibility," in Chicano Art: Resistance and Affirmation, 1965-1985 eds by Richard Griswold del Castillo, Teresa McKenna and Yvonne Yarbo-Bejarano (Los Angeles: Wright Art Gallery, University of California, 1991), p. 2.

3) 1930년대의 공항과 1940년대 초반 전쟁준비로 미국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보수적이고 근검절약하는 자세가 강조되었다. 바로 그 시기에 등장한 주트 슈트는 지나치게 통이 크고 재킷이 길어서 정부의 방침에 위배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특히 주트 슈트가 흑인이나 이탈리안 커뮤니티의 젊은이들로 옮겨가게 되면서 주트 슈트를 입은 젊은이들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더욱 강화되었다. Luis A. Alvarez, The Power of the Zoot: Race, Community, and Resistance in American Youth Culture, 1940-1945 (Austin: University of Texas, 2001)

4) 해리 갬보아 주니어 인터뷰, Del Zamora Actor Reel Part 39, a documentary on Asco, directed by Juan Garza and edited by Chliad Inc,2010.

5) 앞글 인용

6) 윌리 헤론 인터뷰 인용, "The Wall That Cracked Open," a video as part of an exhibition entitled "Xicano Moratorium to the Ballad of El-Lay: Herrón 1970-1980" at Federal Art Project, Los Angeles, 2009.

7) David James, The Most Typical Avant-garde: History And Geography Of Minor Cinemas In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5), p. 63.

© 2018. Koh, Dong-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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