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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미학과 관객참여의 실상(實狀):
부산 비엔날레, 문화역서울 《플레이타임》, 경기도 미술관 《동네미술》

고동연 (미술사가)

관계의 미학이란 “일련의 예술적 행위의 이론적이고 실질적인 출발점을 독립적이고 개인적인 공간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총체성과 그리고 그것들의 사회적 맥락에서 취하는 것이다.”니콜라스 부리오, 2002  1)

 

관계의 미학: 2012-13년의 거대전시의 화두
국내에도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의 『관계의 미학(Esthétique relationnelle)』(1998) 번역서가 출판되면서 그의 이론에 대한 관심이 한층 높아졌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비평적 기준으로 언급하기에는 많은 오류를 지닌 그의 이론이 빛을 발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1990년대 후반부터 그의 입장을 뒷받침할 만한 작가들이 대거 등장하게 되면서부터이다. 그가 관계의 미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1996년 전시 <왕래(Traffic)>에 포함된 작가들은 이름만 들어도 현재 국제 비엔날레를 주름잡는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2)

 

‘관계의 미학’은 예술작업이 궁극적으로 관객이나 사회와의 (민주적인) 관계를 표방하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고민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작업의 주안점이 오브제 자체가 아니라 오브제가 관람객과 만들어내는 관계성에 맞추어지게 된다. 실제로 팔레 드 도쿄 전시들(1999-2006)이나 미술잡지 「플래시아트」(1987-1995), 「미술의 도큐먼트(Documents sur l'art」(1992–2000)를 통하여, 그리고 2009년 테이트 미술관에서 열린 트레날레 《대안 모더니즘(Altermodern)》에서 선보인 작업들에서 완결성은 최대한 배제되어 있다. 대신 이벤트성 극장, 운송기구를 연상시키는 각종 간이 구축물들은 작업에 대한 관람객의 참여를 보다 다각적이고 총체적으로 끌어 들이는 역할을 하여 왔다. 티라바지아(Rirkrit Tiravanija)는 미술관 내부로 일종의 조립식 구축물, 일명 ‘미팅룸’을 구축하고 그 안에서 관람객들은 직접 노래를 부르면서 다른 관객들과 소통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관람객의 참여 과정에서 사용된 간이 구축물들, 정리되지 않은 레디메이드나 기록물(archive)들을 나열하는 전시 방식은 ‘모순되게도’ 관계미학의 주도적인 ‘스타일’로 자리 잡아 왔다. 뿐만 아니라 ‘관계의 미학’과 연관된 작가들은 1970-80년대를 통하여 성장하여온 고전적인 공공미술, 커뮤니티 미술과는 달리 미술관이나 화랑에서 전시되는 작가들과 밀접한 연관을 맺으면서 발전되었다. 소위 기득권과 대안공간이라는 이분법으로 탈피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관계의 미학이 지난 15년간 국제 미술계에서 주요한 이론적 근거, 혹은 미학적 방식으로 자리잡게 된 데에는 1990년대 유럽 지식인들의 위기의식, 미술관 정책의 변화, 문화산업의 대두등과 같은 복합적인 역사적 배경을 들 수 있다. 그중에서도 고전적인 마르크스 이론을 적용하여 해석하려는 부리오의 입장은 유럽에서 공산주의의 몰락 이후 대척점에 위치하여 있다고 생각하는 민주주의 기본 정치적 구조를 새롭게 상상해 보려하였던 인문과학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부리오의 드로잉에 따르면 요셉 보이스식의 이상주의가 새로운 사회구조, 과학기술과 만나게 되는 지점에서 사회는 다양한 네트워크로 이루어질 수 있게 된다. 이를 위하여 작업이나 전시는 특정한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수평적으로 엮어 가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국내에서도 2012년 하반기 부산 비엔날레를 비롯하여 2013년까지 이어진 각종 미술관과 작가 지원프로그램 등에서 선보인 참여예술이나 커뮤니티 예술들도 유사한 목적과 양식을 띈다. 부산 비엔날레의 주요 테마인 <배움의 정원>, 부산문화회관에 선보인 <버킷 리스트>를 비롯한 참여 작업들, 문화역 284의 《플레이 타임》전에 선보인 안은미의 <아트 스쿨>, 홍윤정의 <타로카드 리딩 퍼포먼스>, 경기도 미술관의 《동네미술》전 등에는 관계미학의 주요한 제작방식에 해당하는 관람객의 참여와 특유의 설치방식들이 선보였다. 일종의 뿌리가 없이 떠돌아다니는 플랫폼이나 광주비엔날레에서 재차 인용된 수직적인 관계성이 배제된 상태로 둘러앉은 라운드 테이블의 개념들 또한 특정한 기능성이나 목적성이 불분명한 재로 자유롭게 이합집산이 가능한 개방적 사회적 네트워크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일종의 공리적이고 ‘착한’ 미술의 한 형태로 자리 잡고 있는 관객참여적인 예술적 성향과 관계의 미학을 연상시키는 최근 국내 전시기획이나 작업들은 과연 어떠한 비평적 쟁점을 던져주고 있는가? 실은 이에 대한 비평적인 쟁점은 단순히 국내 전시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수차례 관계의 미학과 연관하여 제기되어져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부리오의 관계의 미학이 중시하는 관계, 즉 새로운 관계 생성과 연관하여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것은 관계의 미학을 연상시키는 작업들이 국제 비엔날레에서 대세를 이루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2012 시드니 비엔날레에서도 인터넷상으로 관객들이 직접 올린 이름들이 시드니 미술관을 벽면을 비엔날레 기간 내내 비추는 기획이 선보인 바 있다.)

 

뿐만 아니라 공공기금을 사용하여 비엔날레를 기획하는 아시아권 국가들에서 이러한 경향은 미술관 전시기획의 새로운 방향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관객참여적인 작업들이 자칫하면 문화산업에서 말하는 단선적인 관객친화적 작업들과 혼돈될 위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공리의 정의나 담론이 간헐적으로 심지어 전략적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는 국내 미술계 상황에서 문화산업이나 자본주의의 힘은 미술계를 더욱 혼돈시킬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과연 어떻게 관객참여적인 작업들을 통하여 개방된 사회 네트워크와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실현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고민하는 것은 다시금 중요한 시대적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부산 비엔날레 <버킷 리스트>와 관객참여의 실상
작업의 내용이나 재현방식에 있어서도 부산비엔날레에 선보인 일련의 작업들은 관계미학에서 중시하는 참여 예술의 전형들에 해당한다. 예술작업이 그 자체의 미학적인 가치나 물질성이 아니라 관객과의 소통에 의하여 진행되고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를 통하여 보다 민주적인 예술가와 관람객의 관계가 성립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특히 비엔날레 기간 동안에 부산 문화회관의 1층에 마련된 <버킷 리스트>는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직역하면 ‘마지막 버킷을 걷어차다’)이라는 영어식 표현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작업의 내용이 전적으로 관람객의 의하여 결정되고 소재가 매우 대중적이라는 점에서 관계의 미학에서 말하는 ‘관계’의 정의를 새롭게 살펴보는데 유용하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버킷 리스트>에서 관람객들의 소원을 담은 종이들과 하루 일과표가 거대한 벽면을 빼곡히 채운다. 이중에서 선택된 문구들은 입구쪽 편 영상화면에 큰 글씨체로 비쳐지게 된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버킷 리스트>에서 일반 관객들이 무엇보다도 흥미로워하는 부분은 종이에 적혀진 내용들이다. 특히 연령대에 따라서 관객의 관전 포인트들도 달라질 수 있다. 개중에는 일상적인 회사원의 삶의 모습을 담은 것들도, 학생들이 남겨 놓은 재기발랄한 소원들도 있다. 그리고 안쪽으로 들어가게 되면 부산의 이모저모를 기록한 엽서들이 놓여 있고, 관객들은 엽서 뒤에 자신의 사연을 적어서 작가들에게 보내도록 되어 있다. 현실적으로 경험할 수는 있으나 일반적으로 일상생활에서 꿈꾸지 못하거나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장소들에 대한 막연한 생각이나 기대를 관람객들은 사연으로 보내게 되는 샘이다. 여기서 작가의 역할은 특정한 장소나 미래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을 투영하는 것이 아니라 관람객의 참여를 유발시키는 각종 기발하고 재미있는 룰을 만들고 제시하는 일이다.

 

그러나 부리오식의 관계미학과 이를 보다 포플리즘적인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는 일련의 관객 참여 작업들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이상적인 사회관계를 제시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필자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관계의 미학이 단순히 새로운 실험적 ‘트렌드’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미학적으로 풀어내기 위한 시도라면, <버킷 리스크>가 상정하고 있는 무엇인가를 희망하고 기대하며 끝없이 꿈꾸는 인간상은 사회적인 네트워크를 통하여 공동체적인 이상향을 꿈꾸는 인간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대척점에 위치한 신자유주의 체제하의 자아 개발을 최우선으로 인간상에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버킷 리스트>에서 무엇이 되고 싶다는 수 없는 희망사항들은 끝없이 경쟁하고 끝없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우리의 미디어 환경에서 이미 익숙한 것들이다.

 

희망사항중에서 가장 흔한 유형은 흠모하는 아이돌이나 연예인을 만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관람객들이 미술관에서, 강제적으로 부여한 방식이나 목적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율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한다는 작업의 주된 의도와는 상반되게 관람객들이 실제로 남겨놓은 문구들은 문화산업이 만들어 놓은 타인의 꿈을 재생산하고 내재화하는 우리 청소년들의 정신세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단순히 청소년들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어른들도 현실에 대한 비판을 시-공간적인 현실세계를 벗어나는 여행이라는 비교적 단순한 방법으로 대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현실의 삶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자유롭게(자신들의 계층적인 문제나 세계화가 지닌 문제점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여행이나 떠나고 싶어 하는 어른들이나 아이돌의 화려한 모습에 자신의 미래를 투영하고자 하는 청소년들이 실상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게다가 거대한 화면에 비쳐진 관람객들의 소원과 모습들은 그야말로 스펙터클을 이룬다. 1960년대 말 프랑스의 국제주의 그룹들은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시민, 관람객들이 기존의 경제, 정치, 그리고 미학적 구도에서 수동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고 비난한 바 있다. 1960년대 좌익이론을 부활시키고 있는 관계미학도 결국 이와 같은 스펙터클 사회에서 시각문화가 대중을 길들이는데 사용되는 것에 비판적이어왔다. 하지만 실상 1990년대 관람객 참여적인 작업 들이 그러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고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대신 <버킷 리스트>와 연관된 이미지속의 일반인들은 고전적인 마르크스 이론에서 비판하는 소위 ‘부르주아적 사회의 추상적인 현실’을 답습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서양철학에서 인간사의 변화를 전적으로 개인적인 정신의 세계로 축약하고 추상화한 것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으로부터 사회비판, 계층비판이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버킷 리스트>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인식이나 비판도 암시되어 있지 않다. 3) 아니 대부분 아예 자신들을 그러한 사회적 제약들로부터 분리시켜 놓고 있다는 점에서 실은 현실도피적이다. 너무 아쉽게도 <버킷 리스트>의 예들에서와 같이 부산 비엔날레에 선보인 참여적인 작업들은 대부분 즉흥적이며 단선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이것은 외국의 유명 큐레이터가 비교적 제한된 시간에 감독을 맡으면서 빚어진 일이기도 하지만, 문화회관의 경우에서와 같이 젊은 기획자들을 따로 뽑아서 기획한 공간에서도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경기도 미술관의 《동네미술》전과 ‘동네’
관계의 미학적인 양식이나 내용을 차용하는 방식은 최근 문화역(서울역) 284에 선보인 <타로카드 리딩>, <아트 스쿨>이나 경기도 미술관에서 열린 《동네미술》전의 하태원 <말들의 정원>에서도 반복되었다. 게다가 홍윤정 작가는 타로 리딩이 이루어지는 공간을 일종의 무대와 같이 마련하고, 타로점을 볼 수 있는 전문인을 섭외하여 오프닝날 관람객들이 참여하도록 유도하였다는 점에서 미래를 담보로 하고 있는 <버킷 리스트>와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운명마저도 자신보다 더 큰 힘이 정해준다는 믿음을 지닌, 적어도 이러한 믿음이 성립이 되어야만 타로 리딩이 흥미로워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작업에서 참여란 외형적인 작업의 존재방식이지 궁극적인 목적이 되기에는 불충분해 보인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막연한 기대를 자극하는 이 작업은 오히려 참여의 기회가 확대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진정 참여를 통하여 개인적인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자신의 미래 사회 현실과 이에 대응하는 허무주의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우리 사회의 한 일면을 드러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반면 경기도미술관에서 열린 《동네미술》전은 보다 명확한 관람객과 작가와의 협언관계, 혹은 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커뮤니티 아트의 방식으로 진행된 작업들을 미술관으로 들고 온다는 다소 위험스러운 생각으로부터 출발한 이 전시는 많은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명확한 관계의 방향성과 범위가 정해져 있다는 면에서 개방성을 전제로 즉흥적이고 단선적인 관람객 참여를 실행한 작업이나 기획들보다 더 많은 생각할 거리를 선사한다. <말들의 정원>은 버려진 화분들을 모으고 화분 푯말이나 부분에 부착한 일반인들의 소원을 화분들과 함께 벽면에 전시한 작업이고, 김월식의 인계시장은 수원 중심지에 위치한 안마 시술소를 개조하고 지역주민과 예술가들이 협업한 과정을 반영하고 있고, 2012 버스 프로젝트는 2006년부터 서울 합정동에서 헤이리에서 운행되어온 2200번 버스선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구민자의 겨울나기 또한 작가가 경기 창작센터에서 대부도 주민들과 함께 김장 담그는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한 것이다.

 

하지만 《동네미술》전에서 ‘동네’라는 개념또한 우리 시대에 포괄적이고 민주적인 관계형성을 위한 전략으로 사용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동네라는 개념이 과연 현대미술에서 미술을 통한 새로운 관계성을 확립하는 데에 있어 얼마나 적합하고 효율적인 개념인가의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한편으로 동네는 서구화, 근대화, 산업화의 과정 속에서 잃어버린 가장 원초적이고 자주적인 지역 공동체에 해당한다. 인계시장이나 막걸리, 대부도의 커뮤니티 등은 급격한 산업화나 재개발의 열품 속에서 내몰린 사라져가는 토착 공동체를 상징한다. 부리오가 주장하는 수평적이고 비권위적이며 착한 사회적 네트워크의 소위 토종 버전인 샘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동네미술》은 단순히 참여만을 쟁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특수한 사회적 현실과 쟁점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동네’라는 개념 또한 과거에 대한 향수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도피적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 두려운 막연한 기대만큼이나 과거에 대한 향수도 현실을 추상화하고 이상적으로 포장하며 고정된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네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현실의 갈등이나 부조리를 일종의 온정주의, 감상주의로 극복할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개념이기도 하다.

 

상징적인 의미에서 전시장을 메운 비닐하우스는 ‘동네’의 분위기를 내는데에는 효과적이다. 그러나 《동네미술》전 오프닝날 <도롱이 주막>에서 관객과 나눈 막걸리가 ‘동네’라는 인간적이고 수평적인 커뮤니티를 결속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지만 동시에 자본주의의 새로운 아이템으로 얼마든지 탈바꿈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4) 또한 동네라는 개념이 서구화 근대화 산업화의 대척점에 위치해 있다면 과연 동네라는 개념을 재생함으로써 신자유주의와 같은 시장경제체제를 매우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즉 자본주의 침식에 맞서기 위하여 동네라는 개념이 과연 일반적이고 효과적인 전략으로 사용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필자는 마찬가지로 회의적이다.

 

제언: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의 융합
부리오식의 ‘관계의 미학’은 1970년대 타자의 미술, 1980년대 공공미술, 커뮤니티 미술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그러나 관계의 미학은 타자의 미술에서와 같이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의 영역을 명확히 한다든지 그들의 고정된 정체성을 규정하지 않아왔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특정한 커뮤니티이나 나아가서 공공을 설정하고 그들을 타깃으로 한 협업관계를 배제하여 왔다. 부리오가 비판하는 다문화주의의 맹점이 바로 위에서부터 아래로 타자나 특정한 커뮤니티를 규정하는 것이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국내 전시들에 등장한 관객참여적인 작업들은 불특정다수에게 공통된 주제를 던져서 참여를 이끌어낸다는 것이 지닌 한계점들을 여실히 보여준다. 분명 전통적인 공공미술이나 커뮤니티 예술의 문제점들도 있을 수 있지만 특정 소외 계층이나 사회적인 이슈를 전방에 두지 않은 채 한시적으로 미술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참여 작업은 더 많은 문제점들을 던져준다.

 

과연 미술관에서 벌어지는 관객참여가 어떻게 보다 넓은 민주주의와 연관된 지평을 암시할 수 있는가? 기득권의 후원을 받아서 수행되는 미술관 전시에서 얼마만큼 비판적인 입장이 수용될 수 있는가? 만약 이러한 사회비판적, 철학적 언명들이 제대로 전달되거나 구현되지 못하는 관객참여 작업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 이미 수많은 미디어와 기술적 기재들을 통하여 다양한 시각적 자극이나 참여의 환상을 경험하여온 우리 시대의 대중들에게 현대미술은 과연 어떠한 전략을 사용해야 하는가?

 

단순히 기술적이고 외향적인 참여가 진정한 미학적, 정치적 참여와 혼돈될 수도 있는 시점에서 다시금 되짚어보아야 하는 질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번 총선에서 다양한 의견수렴과 참여의 기재가 발달하였다고 해서 사회가 무조건적으로 진보적으로 변화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한 현 시점에서 이러한 전략적 고민은 더욱 절실하다. 물론 미학적인 실험이 정치적인 실험이나 개혁으로 이어지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아예 새로운 방법만큼이나 오래된 방법이 이러한 경우들에서 효용가치가 있을 수도 있다. 즉 관람객의 존재감만큼이나 작가의 존재감이 더 부각되어야 할 수도 있다. 참여의 과정만큼이나 무엇을 위한 참여인지, 그리고 결국 이러한 참여가 다른 문화산업에서 강요하는 참여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내용적”인 고민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 더 이상의 참여는 그저 흥미로운 이벤트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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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Nicolas Bourriaud, Relational Aesthetics (Dijon: Les presses du réel, 2002), p. 113.

2) 1996년 전시 <왕래(Traffic)>에 Maurizio Cattelan, Dominique Gonzalez-Foerster, Liam Gillick, Christine Hil, Carsten Höller, Pierre Huyghe, Miltos Manetas, Philippe Parreno, Jorge Pardo and Rirkrit Tiravanija 등이 포함되었다.

3) 인용 Craig J. Calhoun, Classical sociological theory (Wiley-Blackwell. 2002), pp. 20–23.

4) 노스탤지어에 대한 고전적인 이론가 제임슨은 결국 포스트모던적인 현대사회의 문화가 과거를 재활용함으로써 문화산업의 종속되어가는 과정에 주목하여 왔다. Frederic Jameson, 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 (Duke University Press, 1991).

 

© 2018. Koh, Dong-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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