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h, Dong-Yeon
고동연 高東延
국내 오브제 미술의 탈 오브제성, 오브제에서 시스템으로:
이완, 구민자, 박준범
고동연 (미술사)
구민자, 이완, 박준범은 한국 미술에서 오브제가 도입된 후에 본격적으로 개념예술적인 행보를 선보여온 작가들이다. 특히 올 3월초에 대구미술관에서는 이완의 <<개인전>>이, <<젊은 모색>>전에는 구민자의 최근 프로젝트들이 선보일 예정이고, 2월말부터 3월 중순까지 덴마크 니콜라스 쿤스트할의 비디오 아트 페스티벌에 박준범의 영상작업들이 소개되고 있다. (박준범은 현재 호주 레지던시에 참가해서 댐 건설과 연관된 프로젝트도 진행 중에 있다.) 이완, 구민자, 박준범은 공통적으로 기존의 물건이나 ‘레디메이드’로서의 각종 시스템들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이들 작업에서 주어진 일반 물건으로서의 오브제나 시스템들은 그 자체의 물질성이나 물리적인 존재감보다는 사회시스템에 대한 비평적 기능적 매개체로서의 의미를 지녀 왔다. 예를 들어 이완은 자신이 하루동안 볼펜 회사에서 일하고 그 수당으로 볼펜을 구입하고, 하루동안 동일한 볼펜 회사의 주식에 투자하여 번 돈으로 볼펜을 구입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구민자는 뉴욕 레지던시 거주동안에 애틀랜틱과 퍼시픽 에비뉴에서 이국적인 물건을 구입하는 작가의 노동력을 실제 오브제에 부가하여 미술관에서 물건들을 팔았다. 박준범은 거대한 성당 내부의 도면을 실제 성당 사진 위에 부치면서 두 재현 시스템들 사이의 불일치함을 드러내 보이고자 하였다.
일차적으로 오브제를 개념적인 행위의 부분으로 차용하고 있는 이들의 작업은 국내외 미술계의 전체적인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오브제 자체의 미학적인 표현가능성보다는 오브제가 유래한 사회적 맥락과 시스템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비단 국내 미술계의 현상만은 아니다. 2012년 리버풀 비엔날레의 대표 커미션 작업또한 작가가 상파올로 지역의 주민과 물건을 교환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물건들이 전 세계를 여행하고 리버풀까지 돌아오는 과정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아울러 최근 미술계에서 사회비평적인 예술들 또한 직접적으로 사회나 공동체와 연관을 맺으면서 진행되어져오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새삼스럽게 국내 작가들의 작업에 등장하는 오브제 사용의 양상에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제까지 국내 미술계에서 등장한 오브제 관련 작업들에 대한 비평들이 미흡하거나 편파적이어 왔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주어진 오브제의 개념적이고 비평적인 기능보다는 오브제가 지닌 문화적, 역사적 상징성들이 지나치게 부각되어져 왔다. 예를 들어 1970년대 일본에서 서구의 정신주의에 반대하는 이우환과 관계성, 1970년대 이승택 작가의 오브제에 대한 많은 설명들은 오브제와 동양철학이 지닌 특수한 시공간의 미학 사이의 연관성들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왔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아이 웨이웨이의 중국 송나라 유물로부터 수도 굽타의 은식기, 아니쉬 카프의 안료에 이르기까지 비서구권 현대미술에서 등장하게 되는 오브제들은 결국 ‘이국적인’ 문화적, 종교적, 역사적 맥락을 현현하는 매개체들로 이해되어져 왔다.
물론 이러한 비평이야말로 서구 현대미술에서 파생된 오브제를 ‘지역적’인 특수성에 맞추어 발전시켰다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오브제 자체에 집중된 비평은 서구 현대미술 실험에 적합한 일종의 비서구권적인 유형의 구색을 맞춰주는 결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국내의 오브제 관련 작가들뿐 아니라 비서구권 작가들의 많은 오브제 작업들이 비교적 단순 논리화된 문화적인 정체성, 서구에 비한 정치적 ‘후진성,’ 역사성등과 연관되어 해석되어져 온 것도 서구권의 기대에 부합하기 위하여 비서구권의 미술비평이 움직여주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비서구권의 개념 미술들이 서구의 순수미술에 비하여 덜 전문적이고 미학적으로 덜 독립적으로 여겨지거나 서구의 개념적인 오브제에 반하여 ‘이국적인’ 오브제(혹은 현대화된 공예품-artifact) 정도로 인식될 우려를 낳아 왔다.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필자는 이완, 구민자, 박준범의 최근 활동과 작업에서 오브제가 고정적이고 이국적인 의미를 지닌 개체가 아니라 유기적인 각종 사회적 시스템을 문제시 하기 위한 비평적인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이완의 오브제와 유통구조
이완은 오브제가 점차로 작가의 개념적인 제스처의 일부분으로 사용되어져가는 흐름을 이해하는데에 있어 매우 유용한 작가이다. 특히 이번 대구 미술관에서의 그의 개인전은 이러한 변화상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이완의 작업에는 원래 두 가지 특징들이 공존한다. 한편으로는 그의 작업에서는 오브제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물질성이나 기능성이 전제조건으로 작용한다. 두 개의 물건에 추를 달아서 균형을 맞춘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2012)에서 오브제의 물리적인 조건, 즉 무게가 부각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가치(여기서는 무게) 중심에 꿩이라는 우매한 동물을 위치시킴으로써 과연 객관적인 판단기준이 올바른지에 대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질문을 던지도록 유도한다. 오브제 자체가 지닌 물리적인 조건보다는 결국 그것들의 가치를 평가하고 역할을 정의하는 사회적인 시스템에 대한 관객의 관심을 끌어들이는 대목이다.
작가는 누차 오브제의 미학적인 표현가능성보다는 그것들이 처해있던 사회적인 문맥에 대한 관심을 표출하여 왔다. 때문에 이완의 작업 중에서도 일반 오브제 설치 작업뿐 아니라 영상 작업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작가는 <금지된 땅>(2009)나 <케잌>(2010)에서 음식물이 며칠 동안 썩는 과정에서 유충의 알이 성충이 되고 음식물을 먹으면서 성장해가는 유기적인 관계를 기록하고 있다. 이 작업들은 그의 초기 버터 해골작업과 유사하게 바니타스(vanitas)적인 주제로부터 출발하고는 있다. 그러나 정작 감상주의적이고 도덕적인 테마보다는 더욱 주목해 보아야할 것은 유기적인 물건들이 물리적으로 변형되는 과정이 일종의 소우주와 같이 자연의 유기적인 사이클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후 작업들 중에서 오브제 자체의 중요성보다는 오브제가 특정한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변형되고 가치를 부여받게 되는지로 작가의 관심이 옮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생산물: 노동과 이윤’(2012-13)에서 작가는 실제 볼펜가계에서 하루 일해서 번 돈으로 산 볼펜과 하루동안 중권시장에서 동일한 볼펜가계에 투자해서 번 돈으로 산 볼펜을 함께 전시한다. 아울러 증권시장에서 볼펜회사의 주식이 변화되는 추이도 함께 제시한다. 여기서 예술가의 노동을 실질적인 이윤을 창출해내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하지만 더욱 흥미로운 점은 단순히 고전적인 의미에서 오브제가 전통적인 기능을 잃었을 뿐 아니라 아예 새로운 기능, 즉 비평적이고 간섭적인 새로운 기능을 부여받게 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오브제 예술이 오브제를 이용한 예술로 전환된 것이다.
이번 개인전에서 작가는 오브제들과 함께 전체 전시장을 일종의 롤러스케이트장으로 만들었다. 관객들이 모두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수동적으로 따라가게 되는 ‘사회적인 장(field)’에 위치한 객체의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전시장 입구에서 작가는 설문지를 나눠주면서 궁극적으로 우리가 처한 일종의 사회적인 시스템(경제구조, 그리고 그러한 경제구조가 일상생활에서 반영되는 가장 친숙한 장소로서의 마트)에 대한 개념적인 참여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하지만 동시에 북적거리고 각종 장르의 비트가 강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롤러스케이트장은 그러한 경제 시스템속에 갇혀 있으면서도 어떠한 즐거움과 욕망의 발현을 찾게 되는 우리들의 현주소를 조망하는 또 다른 ‘장’이 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완의 작업에 등장하는 오브제들은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시스템에서 각종 가치기준이 갖는 상대적이면서도 결국 폭력적인 의미들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셈이다.
구민자의 <대서양-태평양 상회>
구민자 또한 사회적 가치판단 기준들(학벌, 경기, 실험의 조건)을 다루어 왔다. 안양공공미술제에 참여한 맞선보기 프로젝트 <잘 살아보세>(2010)에서 배우자의 ‘조건’이라는 통념적인 기준에 맞서서 참가자들은 자신의 ‘각종 배경’을 가린 채 맞선을 보았다. 이외에도 작년 6-8월 금호미술관 그룹전의 ‘대서양-태평양 상회’에서부터 11월 금천 미술공장 전시, 올해초까지 이어진 경기도미술관에서 열린 <<동네미술전>>, 그리고 3월 <<젋은 모색>>전에서는 <스퀘어 테이블 : 예술가-공무원 임용 규정 마련을 위한 공청회>에서 작가는 스스로를 일종의 관객 참여를 위한 독특한 이벤트를 일구어내기 위한 다양한 노동자로 변모시켜 왔다.
그 중에서도 금호미술관에 선보인 <대서양-태평양 상회>는 오브제와 연관하여 가장 주목할 만한 프로젝트이다. 무엇보다도 ‘대서양-태평양 상회’에서 작가는 그가 수집한 이국적인 물건들을 전시해 놓고 관객들에게 첫 번째는 작업실, 두 번째는 시장, 마지막으로 미술관에서 각각 판매하였다. 구민자가 원래 이 작업을 진행하게 된 것은 뉴욕 ISCP 레지던시 기간 중에 영어로 ‘대서양’과 ‘태평양’이라는 이름의 실제 거리들이 서로 만나는 지점을 발견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작가에 따르면 이 지역에는 이미 남미, 인도 네팔, 이슬람에서 온 이주민들을 위하여 향신료, 커피, 기름, 차 등의 것들이 판매되고 있었고 관광자의 시점에서 판매하는 “가상 무역회사인 ”Atlantic-Pacific Co.”라는 이름의 회사를 차리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하루 동안 걸으면서 물건을 구입한 9시간에 비례하여 9퍼센트를 본래 가격에 첨부하여 판매하였다.
그러므로 ‘대서양-태평양 상회’에서 물건은 관객과 작가 소통하는 주요한 매개체이며, 가격은 어떻게 특정한 물건이 문화적, 상징적, 심지어 미학적 가치를 부여 받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기재이다. 뿐만 아니라 관객/구매자와의 소통을 통하여 오브제에 대한 의미가 다양하게 재생산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트리니다드 출신의 어느 뉴욕 거주민은 트리니다드 음료수를 발견하고는 그 다음날 국기를 들고와서 작가에게 자신의 나라의 문화에 대하여 설명해주었다. 여기서 고향에서보다 더 큰 돈을 주고 샀음직한 트리니다드의 커피는 이주민에게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애환이 담긴 물건일 수도 있다. 반면 작가에게는 전혀 낯선 문화나 고장에 대한 호기심을 촉발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유독 부모와 학생 관람자가 많았던 금호미술관에서 ‘이국적’인 오브제들은 교육적인 자료로 더 활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오브제의 의미는 오브제 비평들에서 일견 강조해 온 것과 같이 고정적이거나 단순히 ‘이국적’인 것에 그치지 않게 된다. (과연 어떠한 물건이 이국적인것이냐의 문제도 실은 전적으로 시점의 문제이다.) 나아가서 구민자의 가상무역회사에서 팔고 있는 이국적인 고향의 기억은 전지구화 시대의 양면성을 드러낸다. 이국적인 정취는 전지구화된 관광주의의 시대에 다양한 문화적 이국성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다. 애틀랜틱과 퍼시픽 애비뉴의 이주민들에게 고향의 물건들은 그리움과 이주의 아픔을 담는다. 반면에 금호미술관을 방문하였던 국내의 많은 학부모들과 학생들은 구민자 작가의 오브제들을 통하여 전지구화 시대의 이국적 문화에 대한 지식, 즉 상징적인 자본을 쌓고자 하였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완의 오브제가 증권시장을 간여하는 방식을 통하여 그 존재감을 드러내듯이 구민자의 오브들 또한 이국적인 상징적 자본이 덧붙여지는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시스템과 전지구화된 현 상황들을 드러내고 간섭하는 매개체라고 볼 수 있다.
박준범의 불완전한 시스템
이완이나 구민자에 비하여 박준범의 작업에는 고전적인 의미의 오브제(그것이 공산품이건 자연물이건간에)가 직접 등장하는 경우가 흔치 않다. 하지만 만약 오브제의 개념이 물건의 물성이 아니라 레디메이드와 같이 주어진 개념에 해당한다면 박준범 작가야말로 그 세대 작가들 중에서 가장 일관되게 기존 사회 시스템을 인용하여 온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덴마크 니콜라스 쿤스트홀에서 전시중인 <세를 주다(To Let)>(2011)는 건물의 외관에 기업의 간판들을 부침으로써 시장경제의 힘이 얼마나 우리의 공공의 영역과 정치권에 침투되어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경기도 창작센터나 플래토에 선보인 바와 같이 박준범의 시스템등 중에는 개인적인 작가의 아카이브나 기억과 같이 무형적인 것들도 포함된다. <접근할 수 없는 방>(2011)에서 굳이 말하자면 오브제는 작가의 기억을 담아 놓은 상자들이다. 그러나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기억의 상자를 정리하는 일종의 시스템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작가에게는 원근법과 같이 특정한 미학적 기재도 주요한 시스템에 해당한다. (결국 여기서 시스템은 이완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폭력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면 시스템은 분류, 위계화, 삭제의 과정을 수반하게 되기 때문이다.) 박준범은 맨체스터 성당의 내부를 구현한 2차원의 도면을 복사하고 그것을 실제 건물 사진의 내부에 부치는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하였다. 원근법이 3차원적인 공간을 소실점의 입장에서 2차원적으로 변환하는 서구 인본주의 전통의 상징적인 시스템이었다는 점에서 작가에게는 매우 상징적인 작업이다. 그리고 작가에 의하여, 아니 박준범의 유명한 손을 통하여 불완전한 시스템의 오류가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작가가 기존의 시스템을 단순히 타도의 대상으로만 여긴 것은 아니다. 작가가 자신의 글이나 인터뷰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결국 모든 시스템의 사회적 필요성과 역사를 간과할 수는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박준범은 최근 2-3년간 일종의 구조물에 깊은 관심을 지녀 왔으며 버스 실험, 댐 실험 등을 통하여 비교적 친숙하고 우리의 삶과 직결되는 물체나 구조들의 시스템들을 다루어 왔다. 아트 시드니에서 추진 중인 프로젝트도 원래 4대강 댐에 대한 논쟁과 더불어서 생긴 댐의 공학과 연관된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시스템들이 완전한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하여 각종 개념도를 이용한 실험을 진행해 오고 있으며 다양한 아카이브 자료들을 구축하고 있다. 박준범은 다양한 변수를 제공하고 궁극적으로는 내부의 시스템이 부정되는 순간을 연출한다. 그의 이와 같은 과정은 공학적인 구조에 대하여 모르는 문외한이 그 구조물을 재연해 보고 구조물이 결코 모든 상황에서 견뎌낼만큼 완벽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내고 있다. 박준범의 최근 작업들은 뒤샹이 레디메이드를 만들기 전인 1913-14년도에 이미 독일을 방문하고 대안 과학에 매료되었던 때를 상기시킨다. 뒤샹은 이후 기존의 미학적 시스템을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체스에서 ‘엔드게임’과 같이 절대적인 교착상태에서 취할 수 있는 전략에 심취한 바 있다. 시스템의 한계성을 인정하지만 완전히 부정한다기 보다는 상황에 대처하는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뒤샹의 전략과 박준범 작가가 시스템을 대하는 태도는 닮아 있다.
오브제 비평으로 돌아와서
최근 3명의 국내외 레지던시를 통하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오브제 작업이 지니는 의미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들 작가들은 공통적으로 기존의 물건이나 시스템을 사용한다. 뿐만 아니라 직접 그 시스템에 자신들의 물건을 삽입하고 물론 한정적이기는 하지만 그 시스템에 참여하고 교란시키는 제스처를 취한다. 주로 마트의 물건을 사용하여 증권시장이나 유통구조에 관심을 기울여온 이완, 전 지구화된 시대의 이국적인 물건들이 의미하는 관광주의나 이주의 양면성을 직간접적으로 다룬 구민자의 <대서양-태평양 상회>나 태생적인 시스템의 이중성 등의 문제를 다룬 박준범의 영상작업들은 오브제 자체가 지닌 특정한 상징성을 넘어서서 우리 시대의 각종 사회구조와 시스템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환기시킨다. (오브제들 만큼이나 개개인의 가치와 유동성이 특정한 사회 시스템에 묶여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여기서 오브제는 단순히 물리적인 레디메이드로서보다는 기존의 시스템을 활용하고 비평하기 위한 수단이다.
특히 오브제들이 특정한 시스템과 지니게 되는 관계가 개연적이면 개연적일수록 이들의 작업은 더욱 효과적으로 비판적인 기능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비평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하여 결국 오브제는 사라지는 것이 답일 수도 있다. 뒤샹의 회고전을 위하여 급조된 12개의 변기들이 미술관들의 컬렉션으로 남게 된 것처럼 결국 오브제 또한 ‘작가가 선택한 물건’이라는 아우라를 떨쳐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작가들에게 오브제가 지닌 의미가 이중적이라면 그것이 등장한지 거의 1세기가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자칫 오브제의 개념적인 측면을 간과하고 그것을 또 다른 형태의 미학적 기재로 변환시키게 일은, 이를 비평적으로 장려하는 일은 시대착오적으로 여겨진다. 게다가 비평이 비서구권 현대미술에서 등장하게 되는 오브제들이 이국적인 미학적 기재로 읽혀지는 일에 앞장서는 일은 지양되어야 한다. 아무리 복잡한 이론적 기재를 사용하더라도 서구/비서구, 글로벌/로컬의 비생산적인 이분법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비평으로부터 탈피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몫이기 때문이다.
© 2018. Koh, Dong-Y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