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회화, 회화적 질문: 정주영과 허수영의 개인전

고동연 (미술사)

우리시대 미술에서 회화는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이 질문이 생뚱 맞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예술에서 개념의 중요성이 확대되고 다양한 매체나 매체들간의 교류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회화가 지니는 위상이나 역할에 대한 고민은 계속될 수 밖에 없다. 독일의 비평가 얀 베르볼트(Jan Verwoert)가 지적한 바와 같이 회화의 영향력이 다했다고 주장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동시대 미술에서 다양해지는 매체, 장르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회화가 이전과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문제이다. 뿐만 아니라 회화의 새로운 역할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회화로부터 물려 받아야 할 유산과 새롭게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최근에 열린 정주영과 허수영의 개인전은 동시대 미술에서 회화의 역할과 특징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정주영과 허수영은 특정한 풍경에 집중하여 시리즈로 작업들을 생산해내는 전통적인 서구 모더니즘의 고전적인 방식을 따르고 있다. 정주영은 북악산을, 허수영은 자신이 보낸 레지던시 기간 동안 스튜디오 근처 광주의 자연풍경을 집중적으로 다루어 왔다. 흡사 세잔이 프랑스 남부의 산을, 정물을 탐구하였던 것에 버금간다. 그러나 다른 한편 정주영 작가가 부분적인 장면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체계적인 태도는 유럽의 모더니즘보다는 사진을 사용하여 대상의 면모를 분석적으로 접근하여 온 그의 스승 얀 디베츠(Jan Dibbets)의 작업이나 1970년대 이후 독일의 유형화된 사진들을 연상시킨다. 디베츠의 <암스텔담 나의 집에서의 가장 짧은 날>(1970)은 매우 미묘한 변화만을 준 상태에서 방의 반복적인 사진들을 격자모습으로 배치해 놓은 것이다. 인사미술공간에서 개인전을 가진 허수영의 경우에도 자신이 그린 풍경화와 이에 해당하는 영상을 함께 전시해 놓고 있다. 매우 평범해 보이고 일상적으로 보이는 자연의 미묘한 변화에 집중하는 이들의 풍경화는 세잔식의 탐구정신뿐 아니라 동시대 시각문화와 매체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정주영은 이번 개인전에서 광화문 앞에서부터 삼청동까지로 이동하면서 밑에서부터 올려다 본 북악산의 모습들을 선보였다. ‘부분 밖의 부분’이라는 전시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작가는 부분들로 이루어진 전체가 아니라 부분들 그 자체를 더듬어가는 과정에 중점을 두고 있다. 여기서 주어진 대상을 체계적으로 접근해가는 방식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그의 스승 얀 디베츠가 사진을 사용하여 자연경관이나 외부적인 리얼리티를 각 시간과 공간적 프레임에 따라서 쪼개듯이 접근하는 방식과 닮아 있으며, 디베츠나 정주영의 작업에서 등장하는 반복성은 대상에 대한 작가의 정서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을 배제하도록 만든다.

 

작가는 이러한 과정을 “무한정한 내포를 지니는 한에서 자연의 개념들은 항상 다른 사물 안에 있게 된다. 즉 그 개념들은 자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응시하거나 관찰하는 정신 안에, 스스로 자연을 표상하는 정신 안에 있게 된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정주영이 주장하는 ‘정신’이라는 개념은 세잔이나 몬드리안이 추구하였던 현상학적인 문제나 우주의 기존적인 원리 등과는 무관해 보인다. 전통적인 추상화가들이 정신성을 근본적이거나 초월적인 종교, 철학과 연관시켜 왔다면 정주영의 코멘트에서 이상주의나 유사 과학주의적인 열망은 덜 두드러진다. 작가에게는 산을 전체적으로 관찰하고자 하는 의도보다는 부분끼리의 연관성, 차이, 공통점을 찾아가는 관찰의 과정 자체가 더 의미를 지니며, 굳이 여기에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상징성을 부여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때문에 작가는 바위나 나무, 형세의 아주 미묘한 차이들의 변화와 이를 재현하는 과정에 집중한다. 비평가 베르볼트에 따르면 반 모더니즘, 혹은 개념미술 이후의 회화의 발전과정은 체스보다는 도미노를 닮아 있다. 전체 판세를 읽고 접근해가는, 즉 화면 전체나 작가의 예술적 철학 전체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고 접근해 가는 체스가 아니라 도미노와 같이 작은 질문들을 차례로 각 상황들에서 해결해가면서 회화는 발전된다. 더 이상 회화는 거대한 원칙, 표현적이고 천재적인 작가의 구상, 내적 정서를 상정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정주영의 그림이 산을 부분적으로 바라보고 관찰하는 관람자의 시선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허수영은 가장 일상적이고 접근성이 쉽다는 이유를 들어 풍경화라는 장르를 선택하였다고 설명한다. 그는 자신이 레지던시에 거주하고 있는 동안 창문에서 내려다 보이는 자연의 변화를 한 화면에 차곡차곡 쌓듯이 재현하였다. 따라서 화면을 빼곡히 채운 왕성한 초목의 잎들은 있는 사실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계절의 변화 동안에 일어난 변화들을 한 화면에 담은 결과이다. 잎사귀가 앙상할 때는 보였던 창문과 건축물의 구조는 계절이 바뀌어가면서 점차로 가려지게 된다. 여기서 작업의 결과는 작가 스스로의 예술적 의도와 본래적인 구성에 따른 것이라기 보다는 수동적으로 주어진 시점에서 발견되는 풍경의 변화를 기록한 쪽에 가깝다. 다시 말해서 정주영의 작업에서 부분적으로 북악산을 더듬어가듯이 허수영의 풍경화도 시절의 변화를 그저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허수영의 작업은 전시 방식에 있어서도 주목할만하다. 1층에 설치된 풍경화는 미술계의 가상공간이라고 여겨지는 흰 벽에 걸린 것이 아니라 더러운 바닥에 그냥 놓여져 있다. 심지어 비스듬하게 배치된 허수영의 육중한 캔버스는 “예술과 물성(objecthood)”(1966)에서 비평가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가 지적한 물리적인 속성이 강조된 연극적 세팅을 연상시킨다. 2차원의 평면이자 순간적인 신기루를 생성해내는 비물질적인 회화는 실제 시간과 공간에서 존재하는 물건이 되었다. 특히 뒷면이 노출된 채 설치된 거대한 캔버스를 관객은 여러 방향, 심지어 옆면이나 뒤쪽에서도 감상할 수 있게 된다. 덕분에 회화의 평면성에 대한 관심, 즉 회화를 정면에서 바라보게 될 때 생겨나는 회화 매체 자체에 대한 고전적인 이해는 덜해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비스듬하게 놓여 있는 거대한 캔버스는 이차원적인 화면을 관객의 공간에 투영하는 일종의 영화 스크린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평면성이라는 고전적인 회화에 대한 정의는 힘을 잃게 된다. 실제로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허수영은 지하 1층에 풍경화와 함께 동영상을 전시하였다. 시간의 추이를 기록할 수 있는 영상이라는 수단은 한 화면에 사계절을 담았던 허수영 작가의 의도와도 잘 맞아 떨어질 뿐 아니라 결국 회화를 실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존재하며 시간적 추이, 나레티브를 수용할 수 있는 매체로 변모시키고 있다.

 

물론 여기서 작가들이 의식적으로 고전적인 형식주의, 혹은 반 형식주의 비평에 대항하기 위하여 작업을 발전시키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주영의 최근 회화나 허수영의 전시방식은 매체에 대한 개념적인 접근과 고민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한편 정주영과 허수영 작업에서 자연풍경을 관찰하고 재구성하며 재현하는 수단에 대한 관심은 고전적인 형식주의자들에게도 공통적인 것이었다. 모더니즘의 출발점에서 인상파나 후기 인상파들이 자연풍경을 주된 소재로 삼은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즉 외부대상세계를 있는 그대로 재현해야 한다는 중압감으로부터 벗어나서 순수 매체적, 순수 회화적인 질문에 형식주의자들은 집중한 바 있다. 그리고 매체나 시각의 순수한 경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무너진 시대에도 회화의 귀환은 다시금 관찰과 재현의 문제를 꺼내 들고 돌아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 동시대의 회화들은 거대한 모더니즘의 문제들을 축소시킨다. 베르볼트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회화는 더 이상 거대한 질문들과 사투를 벌이지 않는다. 캔버스 전체의 구성을 꿈꾸었던, 균형관계를 꿈꾸었던 체스 판의 테크닉이 아니라 도미노 식의 점차적인 문제해결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정확히 끝을 상정하지 않는 그림의 과정. 과정 그 자체를 풀어가는 것이 새로운 그림의 화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정주영의 북한산은 세잔이 20년간, 드 쿠닝이 한 작업에만 3년간 매달리는 산이나 여성-풍경과는 사뭇 차이를 보인다. 정주영이나 허수영에게 과정은 그저 과정 자체로서도 전시될만한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그것은 어떠한 종착역, 즉 거대한 작가적 과제나 표현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해당한다. 물론 20세기 전반기 미술을 풍미하였던 추상화의 발전과정에서 과정 자체를 중시하는 흐름은 존재하였다. 하지만 새로운 풍경화에서 다루고자 하는 관찰의 문제는 고전적인 형식주의자들에 비하여 덜 영웅적이고 덜 집착적이며 일상적이다. 그것은 작가 개인을 넘어선 자연세계를 근원을 찾기 위한 것도 내적인 표현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술적인 매체들은 최대한 관찰의 정확성과 모순되게도 다양성을 도모하기 위하여 유용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다시 말해서 정주영과 허수영의 개인전은 오래된 회화의 질문이 어떻게 새로운 매체나 시각적 환경에 의하여 영향을 받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예들이 되고 있는 셈이다. 

 

© 2018. Koh, Dong-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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