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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 유사-역사 다큐멘터리[1] 벤 리버스, 임흥순의 비념, 최원준의 모큐멘터리, 김아영의 도시의 이야기들

고동연 (미술사, 미술비평)

최근 작가나 영화감독들이 만드는 영상이나 영화 작업들이 영화관이나 미술관의 경계를 허무는 경우들이 빈번해졌다. 5월 9일까지 두산 갤러리에서 선보였던 벤 리버스의 <느린 동작(Slow Action)>, CGV에서 전략적으로 만든 독립영화 브랜드 무비 콜라주에서 선보인 임흥순의 <비념>, 미술관이나 창작공간에서 전시되고 있지만 배우들을 동원해서 일종의 허구(fictional)적인 요소를 삽입한 최원준의 <물레>, 김아영의 <모든 북극성>과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이 바로 그러한 예들이다.[i] (최원준의 <물레>는 이번 5월 말에 금천미술공장과 루마니아 국립미술관에서, 김아영의 영상작업들은 영국 런던의 한국문화원에서 4-5월에 걸쳐서 선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 영상작업들에서 예술사진, 극영화, 다큐멘터리의 요소들이 결합된 방식은 미술관들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미디어 영상설치작업보다도 훨씬 복잡하고 다변화 되어가고 있다. 이들의 작업은 오히려 2000년대부터 이후 국제 영화제나 비엔날레를 중심으로 선보이기 시작한 실험적인 다큐멘터리들과 유사해 보인다.

 

예를 들어 2002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초대된 데 벨(Des Bell)의 “마지막 이야기꾼(The Last Storyteller)’의 경우 전통적인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영화는 동명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소설 속 이야기에 따라 진행된다. 한편으로는 구술사의 형식과 실제 역사속 아일랜드의 사진들이 등장하지만, 다른 한편 리얼리티를 찍는 감독과 과거의 기억을 재생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역사소설의 허구적인 이야기들이 혼재되어 있다. 편파적이고 불완전한 기억에 기반을 둔 과거의 이야기나 소문들이 아카이브 사진들과 결합되면서 관객은 과거의 역사적 진위에 대하여 배우기 보다는 감독이 과거 삶의 방식을 소위 ‘상상’해가는 과정을 따라가게 된다.

 

작가들이 만든 아카이브를 이용한 영화나 유사 다큐멘터리들도 허구와 리얼리티의 구분을 혼돈시킨다. 두산 갤러리에서 전시된 리버스의 가장 잘 알려진 <바다에서 보낸 2년>은 실제적인 요인과 허구적인 요소를 결합시킴으로써 미술계뿐 아니라 영화계에서도 주목 받은 바 있다. 작가는 다윈의 책<종의 기원>에나 등장할법한 원시 자연에서 생존하는 인간의 과정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찍기 위하여 실제로 유사한 경력을 지닌 남자를 주인공을 삼고 그가 자연에서 생존해가는 모습을 리얼리티 텔레비전과 같이 포착한다. 여기서 생존능력과 경험이 있는 인물은 자신의 ‘생존기’를 이번에는 감독과의 협업아래에서 재연(re-enact)해 내고 있다. 리버스의 <느린 동작>에서도 작가는 지구멸망 이후 인류가 이주할 수 있는 오지에 위치한 3개의 섬들을 직접 방문한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속 원주민은 실제로는 작가가 고용한 배우들이며, 영화 속에는 아카이브 사진, 일반 인터넷이나 사진책에서 발견되는 사진과 소리,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과 음향효과들이 콜라주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예술가들이 역사적 기억이나 구술 등에 관심을 지니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는 과거의 이미지나 자료를 아카이브화하고 저장할 수 있는 다양한 기술적 방식들이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왔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각종 역사적인 기록을 통칭하는 의미에서 ‘아카이브’에 관한 관심은 공식적인 역사적 서술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들이 꾸준히 제기되어 온 인문과학의 흐름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미쉘 푸코는 일찍이 서구 학문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어져 온 분류, 지식체계, 그리고 이를 위한 기초자료로서 공식적, 비공식적인 아카이브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정신병자, 성적인 소수자에 대한 그의 역사적인 서술은 객관적이라고 여겨지는 생리학, 의학의 분야 또한 기득권이 교육과 학문을 통하여 조장하여온 특정한 관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왔다. 그리고 이러한 비평적 주제는 대표적인 해체주의자인 데리다의 <아카이브 열풍(Archive Fever)>(1998)로 이어졌다.

 

그러나 데리다는 공식적인 역사적 사료에 반하는 확대된 의미의 아카이브 또한 특정한 계층, 집단의 관점을 투영할 수 밖에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와 모순점을 지적하여 왔다. 공식적인 역사적 서술이나 이를 거부하는 입장에서나 특정한 사료, 즉 아카이브에 대한 접근성이나 이를 보존하고자 하는 열망자체도 결국은 역사적이고 상대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결국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그리고 역사적 자료들은 절대적으로 믿을만한 것들인가?”

 

유사한 맥락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현대미술에서 영상작업들에서 사용되는 아카이브들은 특정한 리얼리티(시-공간적으로 떨어진)를 일종의 객관적인 지식으로 재현하고 소통하는 것이 결국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관객으로 하여금 인식시켜주고 있다. 실제로 리버스, 최원준, 김아영은 각각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고 있는 영화에서 자신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장면들이나 때로는 무관해 보이는 사료장면들을 삽입해 놓음으로써 그러한 혼돈을 가중시킨다. 어디까지가 실제 섬의 모습이고 어디서부터가 작가가 재현하고자 하는 모습인가? 과연 폭력과 연관된 각종 물레의 역사는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한국 최초의 여자 경마기수 박진희에 대하여 알려진 사실 중에서 무엇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인가?

 

벤 리버스의 공상과학 다큐멘터리

두산 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영국의 미디어 작가이자 영화감독 리버스의 <느린 동작>은 지구멸망의 위기상황을 상정하고 그러한 위기상황에서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세 섬의 물리적인 조건과 생존전략, 역사 등을 설명하고 있는 유사 과학 다큐멘터리이다. 작가는 이를 위하여 직접 오지에 위치한 섬들을 방문하고 실제 그곳의 자연풍경을 담아 냄으로써 다큐멘터리가 갖추어야 할 리얼리티적 요소를 극대화하였다. 게다가 리버스는 16mm 카메라를 사용하여 원래의 현장에 대한 즉각성을 높였다. 하지만 <느린 동작>은 여러 면에서 전통적인 다큐멘터리와는 차이를 보인다. 리버스는 이미 다른 곳에서 사용되었거나 타인이 만든 장면들을 자신의 영화에 콜라주해서 삽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때문에 도시에서 발견되는 이미지들, 오래된 유적지를 연상시키는 흑백의 이미지들이 혼재되어 있다.

 

영화에서는 세 가지 섬의 시각적인 지형도를 포착해내기 위하여 다양한 밀도와 현실감을 지닌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공상과학 영화에나 자주 등장하는 폐허의 이미지는 정확히 시간과 공간의 출처를 알 수 없는 과거를 상정한다. 동시에 자연풍경의 세부 사진들은 흡사 자연사 박물관에서 발견되는 과학사진들을 연상시킨다. 다양한 밀도와 현상, 카메라 렌즈를 사용한 작가의 사진적 기술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점을 오가는 다큐멘터리의 수법을 재현할 뿐 아니라 리얼리티를 해석, 설명, 관찰하는 다양한 시선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특히 지구 종말 이후의 폐허를 암시하는 듯한 빛 바랜 흑백사진은 시간 개념을 혼동시킨다. 미래 공상과학영화에서와 같이 결국 미래가 과거 속에서 보았음직한 이미지로밖에 재현될 수 없는 특수한 시간 개념을 선보인다.

 

무엇보다도 가장 황당한 부분은 인류가 미래에 피난처로 쓸 공간을 현재의 모습 속에서 재현한다는 기본 가설, 즉 닥치지도 않는 미래의 모습을 대부분 폐허와 같이 과거나 현재의 모습을 가지고 재현한다는 설정 자체이다. 게다가 서로 다른 이미지를 결합하거나 반면에 지나치게 심각한 내레이션의 내용은 <느린 동작>이 전통적인 다큐멘터리와는 달리 리얼리티를 재현하는 방법 자체를 탐구하는 유사 다큐멘터리에 가깝다는 사실을 인식시켜준다. 지나치게 심각한 목소리와 다양한 환경오염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는 듣는 이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켜준다기 보다는 지구의 종말과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들이 과학적인 사실인지 아니면 과장된 공상과학영화의 부분인지 의문이 들게 한다. 게다가 인류의 종말 자체를 재연한다는 것 자체가 과연 현 세대에 허락될 수 있는 것인지, 과연 그러한 집착이 현 세대에게만 한정된 것인지, 아니면 인류가 지속적으로 자신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재생산하는 방법으로 이어 왔는지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게 된다.

 

모순된 점은 리버스의 매우 세련된 편집과 사진기술로 인하여 영화를 감상하는 내내 관객들은 아름다운 오지의 장면을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즐길 수 있게 된다. 인류의 종말과 연관된 장면을 이리도 아름답게 찍을 수 있다는 점도 신기하지만 현재 실제 풍경들에서 인류의 미래를 조합해 내고 있는 리버스의 다큐멘터리는 결국 미래에 관한 것이 아니라 보다 다양한 이미지들과 소리의 조합에 익숙한 우리 시대의 자화상에 해당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종말을 설계하고 상상하며 이를 실제 상황에서 이미지로 재현할만한 기술과 배포를 가지게 된 것일까?

 

최원준의 <물레>

리버스의 영화와는 달리 최원준의 영상 작업들은 한국의 근대사라는 비교적 시간과 공간적 배경이 명확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또한 근대사를 비평적으로 재조명해 본다는 일종의 역사 다큐멘터리가 지닌 착한 의도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원준에게도 과거의 역사를 재현한다는 문제는 그리 단순치만은 않다. 군사정권과 연관된 격동의 한국 근대사를 다루고 있는 최원준의 <물레> 또한 결국 증명되기 힘들거나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다큐멘터리들과는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역사 속에서 잊혀져 가는 문래동 지역의 역사를 다룬다. 이 지역에 원래 박정희 당시 육군소장이 쿠데타를 준비하던 아지트가 존재하였다는 사실, 1970-80년대 국내 제조업의 근간을 이루는 철들이 많이 생산되던 곳이라는 문래동의 역사로부터 작가는 시작한다. 문래동 작가로 분한 배우는 지금도 남아 있는 문래동 공원의 박정희 흉상을 녹여서 총을 만든다. 문래동 철공소들이 쇠퇴하면서 1990년대부터 문래동에서 거래 자체가 금지되어 있는 총이 제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총을 만들었던 작가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인하여 생명을 잃게 되고 이렇듯 과거의 역사가 재현되거나 혹은 반복해보고자 하는 작가의 시도는 불발로 끝나게 된다.

 

장소의 역사적인 특수성을 충실히 이행하고자 작가가 총을 만들게 되고 총을 쏘다가 실수로 죽게 되는 어이없는 이야기의 전개는 역사적 기억을 재생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암시한다. 혹은 달리 해석하자면 문래동의 원래 지역명인 물레(문래동에는 일제시대부터 방식공장이 성행하였다.)가 의미하는 바를 반영하는 듯 돌고 도는 폭력이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여기서 작가는 한편으로 오래된 역사적 기억에 의거하여 허구적인 상황을 설정한다. 즉 문래동을 연상할 때 억제되어오거나 비밀스럽게 전해지던 이야기를 꺼내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총에 맞고 죽어버린 작가의 최후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바와 같이 문래의 장소성을 보여주었던 한 일화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과거의 기억은 증명할 겨를도 없이 일종의 신화가 되어버린다. 게다가 작가의 죽음은 상징적인 의미에서이기는 하지만 과거의 역사를 재생해보려는 작가의 의도를 좌절시킨다. 과연 작가는 왜 문래의 숨겨진 역사를 끄집어 내고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왜 문래동의 작가로 분한 배우가 극 중에서 죽음을 맞이하도록 내버려 두고 있는가?

 

작가 스스로가 모큐멘터리라고 설명하는 <물레>는 처음부터 문래라는 장소성이나 장소성을 현현하는 과거의 기억을 규정하는 것 자체에 대하여 회의적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도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들이 문래의 역사성과 무관하다고도 볼 수 없다. 과연 얼마만큼의 총이 유통되었는지는 모르지만 1990년대 이후 문래의 철공상들이 겪고 있는 애환만큼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한 애환을 또 다른 창작의 기회로 삼게 된 극중의 인물이 지닌 도덕적 책임감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최원준의 다큐멘터리는 한편으로는 문래예술공장을 통하여 잘 알려진 문래라는 공간이 국내 산업화, 근대화, 그리고 폭력적인 일상에 지니는 새로운 역사적 의의를 일깨워주고 있다. 동시에 다큐멘터리의 허구성이나 어처구니 없는 결말은 과연 이러한 역사가 현재에도 재연되고 있는지, 이러한 역사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지에 대하여 관람객들에게 물음표를 던지게 만든다.

 

김아영의 “도시의 이야기들” 시리즈 중에서

김아영은 작년 3월에 삼성 리움 미술관에서 선보인 19세기 거문도를 둘러싼 영국군들에 관한 역사를 다룬 영상작업, 역사박물관에서 전시된 일제시대의 고속열차에 관한 사운드 설치 작업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근 현대사에서 잊혀진 역사를 주로 다루어 왔다. 올해 5월 영국의 한국문화원에서 전시될 <모든 북극성>과 <돌아와요 부산항에> 또한 항구도시 부산의 근대화 과정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기억을 추적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김아영은 여느 다큐멘터리 영화작가와 마찬가지로 아카이브 확보와 사전 준비를 철저하게 진행한다. 여기서 김아영이 수집하게 되는 역사는 물론 공식적인 기록에서는 별 의미를 지니지 못하거나 알려진다고 해도 그 존재감이 미비할 수 밖에 없는 사건이나 개인적인 역사들이다.

 

이번 영국에서 전시되는 “두 도시의 이야기”시리즈 중에서 <모든 북극성>(2010)이나 <돌아와요 부산항에>(2012)는 부산항을 중심으로 한국이 세계에 자신의 모습을 재현하거나 일본을 통하여 외래문물이 들어오는 경로를 보여준다. 특히 모든 북극성은 동일한 이름의 경마와 박진희라는 한국 최초의 여성 경마기수의 자살을 계기로 부산에 유입된 국내 경마문화의 역사와 여자 경마기수의 비애를 다룬다. ‘북극성’이라는 말은 원래 좋은 혈통을 타고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국내에 유입되었다. 여기서 ‘북극성’이라는 말의 이름은 닿을 수 없는 하늘의 별처럼 결국 이루지 못한 경마와 경마기수의 꿈을 나타내는데 적합해 보인다. ‘실패한 과거’로서의 <모든 북극성>이 보여주는 ‘븍극성’말과 기수 박진희의 이야기는 할 포스터가 “아카이브적인 욕망”(2004)에서 설명하고 있는 현대미술에 등장하는 아카이브의 속성을 연상시킨다. 포스터에 따르면 아카이브는 대부분 발굴되어야만 하는 이루지 못한 실패한 과거의 추억들에 해당한다.[ii]

 

하지만 비극적인 부분은 박진희의 못다한 꿈에 그치지 않는다. 국내에 경마와 북극성이 유입되는 과정에 대한 기사에 비하여 박진희의 죽음은 신문에 단신으로만 실렸다. 특히 신문에 나오는 작은 사진, 전광판에 남아있는 숫자 정도로만 기억되는 박진희나 모든 북극성의 존재를 추적하는 과정은 역사적 진위 여부를 넘어서서 결국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을 수 밖에 없는 흔적을 더듬어 가는 과정이다. 물론 프랑스 영화비평가 새퍼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대상에 대한 충실함은 완전할 수 없으며, 기억을 되찾아가기 위한 게임이나 특정한 의도를 지니고 재현하는 책략에 가까울 수 밖에 없다면, 전통적인 다큐멘터리에서 주장하는 역사적 진위성은 더 이상 실현 가능한 목표가 아니다. 게다가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는 과거의 기억을 재 추적하려는 시도는 근본적으로 더욱 힘들 수 밖에 없다. 특히 <모든 북극성>에서 박진희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는 사실은 한국과 일본 경마기수의 경쟁에서 밀리고 여자와 남자 경마기수들간의 경쟁에서 밀린 박진희의 ‘타자화’된 위치를 재확인시켜 준다. 또한 그녀의 자살은 그녀가 일본 기수에 밀려서 경마기수로 설 자리를 잃게 된 상황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카이브/다큐멘터리: 역사적 재현의 한계를 넘어서서

리버스, 최원준, 김아영의 영상 작업들은 아카이브나 실제 리서치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역사적 기억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진행형으로 남겨둔다. 허구와 진실을 오가는 이미지들과 내레이션은 다큐멘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역사적 기억에 대한 해석, 리얼리티의 진정성에 대한 해석을 관객의 몫으로 돌린다. 혹은 최원준의 작업에서와 같이 결론이 나지 않기 때문에 과거의 사건이나 소문은 영원히 미스터리로 남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기억이 지닌 모호함과 이를 현재의 시점에서 제대로 재현할 수 없는 상황자체가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다. 안드레아 휴이센은 <과거들을 재현하기>(2003)에서 아카이브의 ‘신빙성’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과거의 기억을 단순히 소문, 루머, 폐허가 되어서 재건할 수는 없거나 공동체적인 ‘정신적 외상(trauma)’이나 망령 정도로만 설명하는 것에 대해서도 경고한다.[iii] (휴이센은 과거의 기억을 재생하고 저장할 수 있는 다양한 매체가 발달하게 되면서 현대인들이 오히려 역사적 기억을 제대로 재현할 수 없거나 그에 대한 접근이 한정적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더욱 조바심을 내게 되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면 역사의 물질적인 흔적으로서의 아카이브를 사용한 다큐멘터리가 충실하게 과거를 재현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그러한 테마를 다루게 된 계기가 지니는 의의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리버스가 다루고 있는 자연환경의 파괴와 연관된 메시지들, 문래의 영세 철공업자들이 총을 만든다는 소문이나 박진희의 죽음을 둘러싼 정황들은 모두 인류의 비극적인 종말이나 쇠퇴와 연관된다.

 

따라서 다큐멘터리가 다루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진위나 재현가능성을 논하기 보다는 다큐멘터리의새로운 역할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편이 더 생산적으로 여겨진다. 이에 필자는 아카이브가 과거를 재현하기 힘들다는 사실보다는 이들의 다큐멘터리에서 과연 어떠한 정보를 누가 어떻게 얼마만큼 접근하고 있으며 왜 현재에 왜 그렇게 과거의 기억들, 소문들이 해석되고 있는지에 대하여 주목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이들의 다큐멘터리를 적어도 역사적 기억에 대한 가장 불완전하기만 솔직한 탐구의 과정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전적으로 올바른 역사적 기억과 틀린 기억을 구분할 수 없다면 이제까지 우리가 인식하여온 역사적 리얼리티에 대한 대안으로서 현재를 통하여 미래를 상상하거나 과거의 소문을 재생하는 일들을 통하여 적어도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역사적 기억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기 때문이다.

 

 


 

[1] 제목은 1959년 프랑스 영화 <히로시마, 나의 사랑(Hiroshima mon amour)>를 연상하면서 부쳤다. 기억의 불명확함이나 해석의 차이를 다루고 있는 이 선구적인 영화는 누벨 바그뿐 아니라 흑백스틸 사진으로만 구성된 <선착장(La Jetee)>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i] 벤 리버스의 다큐 픽션 <바다에서의 2년(Two Years at Sea)>은 2011년 64회 베니스 영화제에서 비평가연맹(FIRESCI) 상을 시상하였고,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국제경쟁부분에 초대되었다. 임흥순의 <비념>도 2012년 전주 영화제에 초청된 바 있다.

[ii] Hal Foster, “An Archival Impulse,” October (Fall 2004), pp. 3-22; 포스터가 인용하고 있는 타시안 딘(Tarcia Dean)은 행방이 묘연한 크라우허스트(Crowhurst)라는 1960년대 실제 존재하였던 실패한 사업가의 종말을 추적한 시리즈의 작업들을 제작하였으며, 한정된 아카이브 자료를 가지고 박진희의 삶을 추적하는 김아영의 과정과 유사해 보인다. .

[iii] Andrea Huyssen, Present Pasts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3), pp. 7-8.

© 2018. Koh, Dong-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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