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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혜택 받은 이들의 반격: 홍영인 (신도리코 문화공간), 조영주(오산 시립미술관)

고동연 (미술사)

“하지만 여성의 약한 위치(inferiority)를 통하여 [확실히] 여성은 이득을 취할 수도 있다. 왜냐면 어차피 여성은 남성에 비하여 덜 운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여성은 남성들에게 주어지는 이득에 대하여 탓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여 왔다. [때문에] 사회적인 정당성에 대하여 일종의 조율을 하는 것이 그녀들의 몫도 아니고, 이를 준수할 것을 요구받지도 않아왔다.” (시몬드 드 보봐르, <제2의 성> (1949, 영문판), p. 695)

 

홍영인은 신도리코 문화공간으로 12개의 화환들을 배달시켰다. 화환의 전체적인 크기와 가격이외에 작가는 화원 주인들에게 꽃의 종류나 배치에 대해서는 따로 주문하지 않았다. 홍영인의 작업은 일차적으로는 일반 물건을 문화공간에 치환시키는 현대미술의 한 전형적인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업을 단순히 현재미술의 존재론적(ontological)인 질문에 한정시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무엇보다도 12개의 화환들이 던지는 도발성 때문일 것이다. 축하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배달되어져온 화환들은 작가의 전시가 아닌 제각기 자신들의 화원을 선전하는 문구를 담고 있다. 게다가 굳이 비슷비슷해 보이는 화환들을 12개씩이나 따로 주문한 부분도 관객을 당혹하게 만든다.

 

최근 오산 시립미술관에서 선보인 조영주의 2인 전에서도 ‘환경미화’적인 목적을 위하여 사용되는 장식품들이 등장한다. 조영주는 프랑스 유학 당시 성탄절 장식품을 하나둘씩 훔쳤다. 그리고 훔친 성탄절 장식품들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성탄절이 끝난 후에 작가는 훔친 장식물들을 모아서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유학생 여성작가가 성탄절 때 경험하였던 외로운 정서적 상태를 잘 부각시키는 이 작업에서도 뒤샹식의 치환보다는 작가의 절도 행위가 두드러진다.  

 

현대미술에서 예술적 실험이라는 명목으로 타자의 영역, 정보, 심지어 물건을 작가가 맘대로 전유해온 예들이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개념미술의 역사가 짧고 비교적 덜 과격하고, 추상적인 수준에 그치는 많은 국내 개념미술의 현황을 보면 직접 사회, 거리로 진출해서 관객들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현대미술을 하는 국내작가들이 흔치는 않다. 이러한 측면에서 주로 유학파 출신으로서 국내에 전시를 해오고 있는 홍영인이나 조영주의 예들은 주목할 만하다. 게다가 이들이 여성이라는 점을 감안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도발적인 그들의 예술과 정체성의 문제를 연관시키지 않을 수 없다. 홍영인이 지난 10년간 발전시킨 자수 작업과 연관하여 시작된 파출소 작업이나 조영주가 프랑스에서 발전시킨 작업들에서 법이 규정한 적정선, 혹은 개인의 영역을 지속적으로 침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행위를 보봐르가 단언한 바와 같이 사회적으로 차별화된 여성들이 흔히 취하는 생존전략으로 보아야 하는가? 어차피 남성들을 위한 사회적 정당성이나 공정성과는 무관한 여성들이 ‘법’에 대하여 반격하기 위해서는 결국 법의 허용범위를 약간 비껴갈 수 밖에 없는 것인가?

 

홍영인의 꽃배달
홍영인의 자수 작업이나 꽃 포스터 작업은 국내에도 여러 차례 소개되었고, 올해 열렸던 그룹전에서 작가는 자수와 전통적인 회화적 수법을 결합한 ‘장식적’인 작업도 선보였었다. 그러나 홍영인 작업의 소재나 외향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작업이 지닌 도발적인 의미를 관객들이 파악하는 데에 있어 방해가 되기도 한다. 작가 스스로도 밝힌 바와 같이 과시적이고 연극적이며 드라마틱한 효과들이 꽃이라는 소재를 만났을 때 비판적인 의도보다는 작업의 장식적이고 감상주의적인 측면이 부각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홍영인의 작업은 그것이 전시되고 수용되는 맥락에서 펼쳐지게 되는 작업 외적인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번에 신도리코 문화공간에 오프닝날 배달된 화환들 또한 ‘꽃배달’이라는 홍영인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2004년 <I Will Commit Crime Forever and a Day>에서 작가는 삼청동의 한 파출소에 공문을 보냈다. 공문에서 작가는 서울의 다른 지역에 위치한 화분들을 훔쳐서 파출소 앞 화단으로 하루에 하나씩 옮기는 프로젝트의 기획안을 명시하였다. 그리고 기획안에 따라 그녀는 정해진 기간 동안 매주 화분을 훔쳐서 파출소 앞을 장식하였다. 여기서 작가가 화분을 옮기는 일은 매우 간단하며 심지어 화분의 종류나 배열방식은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다. 대신 이 행위는 결국 한 그룹의 이득을 위해서 하게 되는 행위가 다른 그룹에는 해가 될 뿐 아니라 ‘죄(罪)’에 해당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면 파출소 앞의 환경을 개선하고자 하는 작지만 중요한 사회적이고 고의적으로 생산적인 작가의 행위는 파출소의 공무원들이나 그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영문도 모르게 화분을 빼앗긴 도시의 다른 주민들에게는 분노할만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 일을 허락하고 급기야 파출소 앞의 환경이 개선되는 것에 대하여 공감하였던 파출소의 경찰관들을 의식하지 못하는 작가의 범법행위를 돕는 샘이 되었다. (경찰과 홍영인의 관계는 이 작업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며 전년도에 홍영인 서울 개인전에서는 직접 파출소의 직원들이 갤러리 내부에 작은 초소를 지어놓고 화랑 관객들에게 파출소의 각종 민원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일종의 도센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홍영인의 작업에서 화분이나 화환 자체보다는 그것이 이동되는 과정을 통하여 전혀 예기치 못한 개체나 단체들 사이의 만나게 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그 만남의 결과로 이제까지 통상적으로 미술계 내부에서 논의되는 것보다 훨씬 복합적이고 복잡한 질문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 이번 신도리코 전시에서도 자신의 화원 이름을 거대하게 새긴 화원 주인들이나 현대미술을 후원하고자 하는 기업체의 ‘선의’의 의도는 실은 무시되고 있다. 물론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범법(犯法)적인 행위를 하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엄연히 원래 주어진 화환은 전혀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 변질된 의도가 미리 참여자인 화원 주인이나 기업체에 전달되거나 이해받기 힘들다는 점에서 작가는 다분히 고의적이다. 꽃이나 그녀의 자수 작업은 일종의 매개체로 남게 될 뿐 작가는 화환업체, 문화공간 후원 기업체, 홍영인의 자수 작업에 대하여 기대를 지녔던 관객들 사이의 전혀 예기치 않았던 만남을 주선하고 있다. 물론 이를 지켜보는 작가에게 그 과정은 스릴 넘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당하는 입장에서는 당혹스럽고 혼돈스러울 수밖에 없다.

 

조영주와 타자의 물건/영역 (제목 제안?)
주로 조율자로서 철저하게 놀라우리만큼 자신을 전면적으로 등장시키지 않는 홍영인에 비하여 조영주는 사회가 허용한 ‘선’들을 살짝 살짝 넘어가는 자신의 존재를 감추지 않는다. <파리 루르멜가 77번지의 크리스마스>(2006-2007)에서 비닐 백에 담겨 있는 성탄절 장식품은 원래 그 장식들이 달려 있었던 성탄절 트리의 모습과 함께 전시되었다. 그리고 사진 밑에 작가는 스스로 훔친 장식물들이라고 적어 놓는다. 성탄절과 같은 주요 절기에 소외감을 경험한 유학생의 반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흥미로운 일은 그녀가 다시 훔친 비닐 자루속의 성탄절의 장식품들을 돌려주었을 때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녀의 절도가 주민들의 어떠한 사회적 관심도 받지 못하였다는 것 자체가 더욱 슬프게 여겨진다. 분명 홍영인의 경우에서와는 다른 정서적인 관객의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유학시절 작가 조영주에게 무관심만큼이나 그녀의 타자성을 작가에게 인식시켜주었던 것은 동양여자에 대한 외국남자들의 불편한 시선, 즉 사심(私心)이 담긴 관심이었다. <One Night with Someone’s T-Shirt in My Bed>(2006-2007)에서 작가는 쉽게 상징적인 의미에서 그녀의 사적인 영역을 응시하거나 침투하기를 원하는 외국인 남성들을 향하여 그녀 스스로가 그들의 사적인 영역을 침투하는 일을 자행한다. 그녀는 파티나 카페, 레스토랑 등에서 우연히 만난 남성들에게 그들의 체취가 남아 있는 티셔츠를 그녀에게 빌려주도록 부탁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 티셔츠를 입고 하룻밤을 보내고 외국 타인 남성의 티셔츠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해 놓는다. 타국 유학생 여성들, 특히 동양 여성들에게 찝쩍거리는 프랑스 남성들을 향하여 그녀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몸을 내어준다. 간접적이지만 남성들이 벗어놓은 티셔츠와 직업 부딪침으로써. 그녀의 프라이버스와 남성들의 프라이버스기 독특한 방식으로 조우하게 된다. 성적인 풍자(Innuendo)를 담고 있는 상당히 도발적인 작업이다.

 

<I Want to Get a Lot of Love Letters>에서 작가는 솔직하고 담백하게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요구하는 편지를 참여자에게 보낸다. 영문도 모르고 편지를 받고 놀라했을 참여자를 생각하면 이 또한 당돌한 일이기는 마찬가지이다. 편지에는 자신의 상황을 매우 피상적으로 설명하면서 외로운 여자로 가장한 작가의 모습이 투영된다. 고의적으로 편지를 받은 이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로 하여금 지구 반대편 동양 여인에게 마음을 담은 편지를 보내도록 작가는 유도한다. 굳이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딱히 문제가 될 만한 일은 아니지만 솔직히 작가가 타자의 영역을 침해하고 그들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다.
 
여성작가와 경범죄적인 현대예술
필자는 원래 홍영인과 조영주의 리뷰제목으로 경범죄라는 단어를 생각했었다.1) 물론 정확히 말해서 중범죄에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범죄라는 단어는 이들 작가들이 자행하고 있는 ‘심각한 범죄’를 가리키기에는 부적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영인과 같이 화분을 옮겨서 파출소 앞을 꾸미거나 조영주와 같이 성탄절 장식을 하나씩 훔치는 행위를 특정한 물질적인 이득을 취하기 위하여 행해지는 절도와 같은 것으로 분류하는 것도 적당치 않아 보인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의 예술적 실험을 실제적인 범법 행위와 혼돈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홍영인이나 조영주의 고의적인 ‘상황극’들을 철저하게 작가들 자신의 타자화된  처지나 현실과 분리해서 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홍영인이나 조영주의 절도 행위를 국내외 미술계, 그리고 사회에서 치열하게 살아남기 위하여 애쓰는 그들의 다양한 정체성과 연관시키고자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들 작업에서 당돌하고 도발적인 측면을 시몬드 보봐르가 언급한 여성들의 이단성과 연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이들의 절도 행위를 과격하게 나쁜 여자(판도라, 공주, 미친 여자, 팥쥐)들과 연관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쁜 여자의 이미지를 구가하거나 여성의 생물학적인 몸을 강조하는 단순화된 방법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법의 범주를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여성작가와 경범죄는 잘 맞는 궁합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특히 여성성과 도시환경, 여성성과 자수와 같은 여성의 노동, 꽃, 장식, 서구인과 동양 여성, 유학생 여성작가의 문제는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여성미술의 소재들이어 왔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이들의 작업이 남성성이나 정형화된 여성성에 대한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관객들을 전혀 상반된 시선과 입장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물론 홍영인과 조영주의 일탈이 태생적으로 지닌 한계점들도 있다. 무관심 속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끝나버린 홍영인과 조영주의 저항은 싱겁다. 예술적 실험이 결국 처절한 생존의 문제까지는 다루지 못해도 외국에서는 타국인으로서 동양 여성으로서, 그리고 국내에서는 유학파로, 그리고 여성으로서 작가의 지위에 대하여 얼마나 구체적인 발언을 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게다가 이들의 저항이 맥락을 모르는 일반 관객들에게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다. 물론 이에 대한 책임이 이들 여성 작가들의 몫만은 아니다. 국내 미술계에 엄연히 존재하는 성차별문제와 최근 젊은 세대의 작가들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는 여성미술의 ‘올바른’ 전략에 대한 논쟁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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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 경범죄(輕犯罪, misdemeanor)는 죄의 경중이 낮은 범죄를 말한다. 중범죄(felony)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과다노출, 노성방고. 동물학대와 같이 남의 재산을 절도하거나 전유하는 홍영인이나 조영주의 범법행위보다 전반적으로 경미한 경우들을 가리킨다.

2) 성재기의 잘못된 비판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덜 유동적인 여성주의 입장들은 여성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사회적 시선들(여기에는 성재기와 같이 과격한 집단으로부터 일반적인 남성, 심지어 여성들도 포함되고는 한다)로부터 여성주의를 방어하고 여성들이 삶 속에서 취할 수 있는 미묘한 전략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코 득이 되지 않는다.

 

© 2018. Koh, Dong-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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