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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직도 예술과 과학인가?: 김용관, 신경진, 박재영

고동연 (미술비평)

“전시의 테마”라는 코너를 주제로 비평을 쓰기로 한 이후부터 필자는 오랫동안 ‘예술과 과학의 만남’이라는 주제에 적합한 전시들이나 작가들에 대하여 고민하여 왔다. 물론 예술과 과학이라는 주제로 활동하는 작가가 충분치 않아서는 아니다. 게다가 예술과 과학은 확대된 의미에서 “미디어”라는 개념으로 대치되기도 하면서 각종 비엔날레나 레지던시, 워크숍의 단골소재가 되어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에 대하여 고민하게 되는 것은 21세기에 과학이 우리의 다양한 미학적, 정치적, 사회적 상상력을 확장시키는 데에 있어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자의 견해로는 현대사회에서 과학의 위상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과학의 발전이 더뎌졌다는 것은 아니다. 융합과 연관된 강연에서 최재천 교수님이 강의하신 바와 같이 더 이상 르네상스 맨, 실사구시의 정약용과 같이 생물학, 건축공학, 물리학 등 다양한 자연적, 공학적 지식을 아우르는 학자를 기대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국내외적으로 이공계 전공자들이 줄어들고 있고 공학도들이나 순수과학 연구자들이 홀대를 받는다는 이야기들을 심심치 않게 듣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문제는 과연 우리 시대에 ‘과학’을 통한 새로운 사고에 대한 열망이 존재하느냐는 것이다. 과학과 철학이 만나게 되는 역사적 사건들, 예를 들어 19세기 다윈이 유물론의 근간이 되는 종의 기원에 관하여 발표하고, 1930년대 칼 포퍼가 가설을 반박하기 위한 반증법을 주장하며, 토마스 쿤이 1960년대 과학의 역사를 결국 과학계의 특정한 지식체계의 자체적인 진화론에 의거한 패러다임으로 설명하고,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물리적인 현상에 관심을 기울였던 경우들에서 과학자들은 과학적 지식을 도출해내는 것 이외에 시대환경과 사고의 변화를 반영하고 주도하였다.  

 

반면에 우리 시대 과학과 연관된 주도적인 이미지가 1960년대의 정신을 디자인과 문화의 상업화로 포장해서 대중화한 스티브 잡스라는 사실이 흥미롭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다. 이에 필자는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 중에서 과학이 만들어낸 열매보다는 과학적 방법론에 근거한 작가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현재 열리고 있는 김용관(인미공), 신경진(공근혜 갤러리), 박재영(정미소)의 전시회는 과학이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만들어내기 위한 목적성을 지닌 행위이기 전에 무엇보다도 사고의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매우 중요한 인간의 지적활동이라는 점을 상기 시켜준다. 과학기술의 매체가 아닌 예술적 상상력의 차원에서 과학을 접근하고 있는 이들의 전시회를 통하여 우리는 과학이 우리 삶에서 지니는 의미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김용관: 표본공간, 희망에 의한 기관의 변이
김용관은 19세기 진화론에서 말하는 생물학적 결정론을 쉽게 연상시키는 표본과 변이이라는 개념에 집착한다. 자신의 업무를 일차적으로 과학자들과 유사하게 그러한 과정을 밝혀내거나  실험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닮은꼴>에서 작가는 중고책방에서 우연적이던 의식적이던 고른 책들을 보면서 책들의 외형적인 유사성에 불구하고 내면적인 변이를 거치게 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철학이나 사회과학의 고전서와 번역서들이 인간 존재나 사회에 대한 공통적인 질문들을 던지면서도 다른 시대나 문화로 전달되면서 변화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7개의 육면체>에서 전시된 7개의 육면체는 여섯 개의 면으로 이루어진 육면체의 기본정의에 충실하면서도 최대한 불규칙하게 형태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불변하는 것은 육면체의 정의이고 변화하는 것은 외부적인 형태이다. 즉 전자가 외형적 유사성에서부터 변이를 발견하고자 하였다면 후자는 주어진 원칙의 유사성에서부터 외형적인 변이, 변화를 관찰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외형상과 원칙상의 불변하는 요소와 변이되는 부분을 비교분석하는 과정은 진화론에서 특정 기관의 역할이나 외형상의 변화들을 살펴보고 각각에 적합한 변이를 추정해내는 과정과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예술가가 변이를 주장하게 될 때 그의 목적은 진화론자들의 그것과는 분명 차이를 보인다. 만약 도출된 결론에 대하여 주관적인 해석을 자제하는 것이 과학자의 중요한 행동강령이라면 작가는 특정한 도형의 변화로부터 자신만의 메시지가 전달되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2층에 전시된 <선의 수가 소수로 이루어진 정다각형의 이상>에서 세밀하게 그린 프린트와 도형이 변화하는 과정을 영상화한 작업은 결국 원으로 다다르는 이상적인 상태와 결코 원에 다다를 수 없는 도형의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즉 원칙적으로 나눠지지 않는 3, 5, 7의 소수를 대입하여 세밀하게 나눈 도형들은 여러 차례 반복되면서 결국 완벽을 상징하는 원(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이데아에 가까운)에 근접하지만 태생적으로 원이 될 수는 없다.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은 김용관의 끈질긴 실험이 과학적 방법론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면서도 관객들에게 자신의 미학적이고 비평적인 입장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실제로 1층에 전시된 많은 책들 증에는 하버마스와 같은 사회비평서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작가는 줄곧 사회적인 변화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도형들이 원이 될 수는 없지만 점차로 원에 가까워지는 상태는 작은 변수가 적어도 외형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작가의 신념을 보여준다. 토마스 쿤이 주장한 과학적 패러다임의 변화가 궁극적으로 사고의 변화를 통하여 시대적 저항의 정신을 실천해간 과학자들의 역사라면 김용관은 이러한 변이와 자신의 희망을 도형작업을 통하여 재연해내고 있는 셈이다.

 

신경진: 신체의 변수
신경진에게도 특정한 과학적 지식에 근간한 표본과 이를 서로 다른 의도에서 변화시키는 과정은 중요하다. 작가는 일기예보에서 비가 올 확률 중 가장 예측 불가능한 확률이 30퍼센트라는 점에 착안하고 아예 30퍼센트 확률로 비가 오도록 기계를 프로그램하거나 태양의 상태를 모방하기 위하여 93.5퍼센트의 확률로 전구에 빛이 불안전하게 깜박거리도록 만든다. <웃으면서 자살하기>(2009)에서는 뇌에 1퍼센트 가량 산소가 부족한 상태를 스스로 재연해낸다. 그러나 신경진이 사용하고 있는 변수들은 수학적인 계산보다는 인간의 신체, 지형도와 같이 보다 불규칙한 요인으로부터 기인한다. 또한 이데아로부터 변이보다는 일종의 오류나 실수가 훨씬 부각된다.

대부분 자신이 만든 기계, 기구의 시연과정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그녀의 작업은 따라서 매우 임의적인 변수나 조건들이 적용된 후에 파생되는 변화를 관찰하는 일종의 사이비 과학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귀국 후 인천 비엔날레 선보인 <Mimicking Venus>에서 작가는 18세기 프랑스 조각가가 개발한 신체측정기를 활용해서 스스로의 신체를 측정한다. ‘본따하기(mimick)’의 부정적인 단어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영상은 비너스의 이상(또 다시 이데아의 상징인 원)으로부터의 그녀의 몸이 지닌 실제적이고 상징적인 거리감, 혹은 오류를 측정하고 형태화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번 공근혜 갤러리에서 열린 신경진의 개인전에는 인간의 신체, 사이비적인 과학 실험과 함께 인류학, 생태학, 환경문제와 같이 작가가 점차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보다 사회역학적인 요소들이 도입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인간의 신체와 행위과학적인 요인이 부각된 벌집모양의 설치작업이 주목할 만하다.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신만의 자양분을 만들어 내고자 애쓰는 상징적인 의미의 독거노인-벌은 작가가 주문한 벌의 행태를 벌의 형태를 지닌 설치물 내부에서 ‘모방' 해낸다. 소위 과학적인 실험이 연극화된 셈이다. 자신의 몸을 감은 가루에 묻은 추출물을 벌집 내부에 반복적으로 바름으로써 꿀을 생성해내는 벌과 같이 유사한 행동을 반복하는 독거노인의 연기는 안타까우면서도 우스꽝스럽다. 특히 아침과 밤을 상징하는 각종 벌집 실내의 변화나 영상을 비춰주는 장면들은 과학적인 실험에서 사용되는 자연스러운 환경의 변화를 인위적인 설정으로 만들어 버린다.

 

직관적이고 연극적인 신경진의 작업은 궁극적으로 과학적 실험이 감추고자 하는 부분을 드러낸다. 과학적 실험들이 최대한 일반화된 경우의 한에서만 변수를 제어하고자 한다면 그녀의 작업에서 아예 변수가 재연되는 상황 그 자체가 영상화되기 때문이다. 신체의 다변성은 작가 스스로의 신체를 어렵게 측정해가는 과정으로, 벌의 생태는 가장 극단적인 경우에 전형적인 벌의 행태를 우스꽝스럽게 ‘모방’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결국 각각의 현상에 대한 관찰로부터 도출된 귀납법이나 일반화된 가설에 반하는 예들을 밝혀내고 이로부터 이론을 ‘체계적’으로 수정해가는 과학적 실험의 과정은 과학적 오류를 연극화한 설정들로 대치된다.

 

박재영: 소리와 이미지의 <11 라리가의 문>(1927)
박재영은 인간의 시지각을 실험할 수 있는 마인드 컨트롤 머신을 전시하여 왔다. 그러나 그가 제작해온 머신, 기계는 전통적인 의미의 기계와는 분명히 다르다. 기계가 기능성과 역할에 의하여 그 당위성이 규정된다면 박재영의 기계는 과학에서 주로 다루는 현상적 차원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어떻게 기계를 바라봄으로써 변하게 되느냐를 실험하기 위한 기계였다. 즉 기계에 대한 기계, 메타 기계였던 셈이다. 이번 정미소에서 선보인 행위예술에서 이러한 기계적 조작의 차원과 인간의 시지각적인 경험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이어진다.

 

이번 정미소에서 열린 협언 전시회에서는 기계 대신에 관객의 시지각적인 경험, 특히 착각을 유발하기 위한 도구로 행위예술가가 도입된다. 두 명의 예술인이 인접한 공간을 사용하고 있으며 서로의 소음에 의하여 개인적인 공간들이 지속적으로 침해당하고 있다는 설정으로부터 시작된 이번 전시설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소리와 잠재적인 소리, 동시적인 것과 지연된 정보들 사이를 조율하는 관객의 세심한 주의를 요한다. 즉 관객은 왼편에 위치한 작가의 스튜디오 영상을 바라보면서도 항시 오른편에 붙어서 직각으로 설치된 행위예술가의 불이 꺼진 스튜디오를 예의 주시해야 하고 마찬가지로 행위예술이 재연되는 동안에는 불이 꺼진 박재영의 스튜디오 화면에 집중해야 한다. 스튜디오에서 박재영의 움직임은 대부분 인접한 행위예술가 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따라서 규정되고 마찬가지로 행위예술가의 움직임 또한 모순되게도 불이 꺼져서 희미해진 작가의 공간에서 들려오는 소음과 빛에 대한 반응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필자가 ‘11 라리가의 문’이라고 제목을 부친 것도 이번 박재영의 전시가 불이 켜진 공간과 꺼진 공간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뒤샹의 이중적인 문(두 입구 사이에 문을 달아서 한 공간을 열면 다른 공간이 닫히는)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실제로 뒤샹의 ‘이중적인 문’은 그가 1916-17년대 독일에서 접하였던 다양한 시지각적 이론들에 대한 그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 인간 시지각의 연구들은 인간이 의식적으로 보는 행위와 보지 못하는 과정, 들리는 경우와 듣지 못하는 경우들 사이에 연계 고리들을 발견하고 있다. 인간은 듣는 순간뿐 아니라 듣지 못하는 순간에도 동일한 뇌가 자극을 받게 된다. 결국 판화에서 음각이나 양각의 상대적인 차이에 의하여 형태가 드러나듯이 외부 자극에 대한 우리의 시지각적 반응도 관계성에 의하여 결정된다. 박재영의 전시에서 왼쪽의 영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꺼진 행위예술가의 스튜디오에 주목해야 하듯이 바로 이 때문이며 작가는 전시장을 이러한 실험장으로 변모시키고 있다.

 

왜 아직도 예술과 과학인가?
예술과 과학은 현대미술에서 끊이지 않는 주요 테마였으며 미술사가들에도 흥미진진한 소재이어 왔다. 각국의 문화정책 또한 ‘예술과 과학’을 일종의 국가 브랜드화의 선봉장처럼 여겨왔다. 미술계의 비교적 덜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주요 서구국가들에서 막대한 예산을 들여서 각종예술을 이용한 예술가들과 협업한 과학자들의 랩을 설치하거나 예술가들과 과학자가 공동으로 거주하는 프로그램을 미술관 내부에 설치하는 정책들은 이러한 맥락에서 생겨났다. 하지만 혁신적인 국가적 이미지를 구가하기 위한 실험들이 단순한 디자인 프로젝트나 ‘고장이 잦은’ 기기들로 전락되는 일들이 빈번치 않게 일어난다. 예술과 과학의 만남이 실험적인 과학적 사고와 예술적 실험들 사이의 만남이 아니라 기술적 지식을 상용화한 기기들로 축약된다는 점은 못내 아쉽다.

 

대부분 30대 중후반의 김용관, 신경진, 박재영의 전시는 이러한 측면에서 ‘예술과 과학’이 어떻게 만나야 하며 만나게 될지에 대한 좋은 밑그림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굳이 미디어 아트에서 사용하는 기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이들의 작업은 관객들로 하여금 과학에서 사용하는 각종 방법론과 이론들을 미술관에서 접하게 만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학이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어야 하는지, 과학적 실험은 과연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진다. 이를 통해서 관객이 과학이 예술만큼이나 개방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비평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고 흥미진진하며 동시에 조롱의 대상도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면 왜 아직도 예술과 과학이어야 하는지에 걱정거리는 충분히 해소될 것이다.

 

© 2018. Koh, Dong-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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