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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지역/장소를 다루다: 백현주(인미공), 홍원석(홍성시장입주작가 보고전), 태이(금천 예술공장)

서구 중심의 현대미술비평에서 장소성은 주요한 키워드에 속한다.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장소 특정적인 작업들에 대한 이론으로부터 장소성과 노마디즘에 관한 이론에 이르기까지 장소성은 물리적으로나 상징적으로 기존의 형식주의가 지닌 문제점들을 비판하는 주요한 개념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형식주의적인 입장에 근거한 일련의 미술비평과 전시방식은 예술작업을 그 역사적, 문화적 장소성으로부터 이탈시키고 최대한 순수형식미의 입장에서 감상하기를 강요하여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주로 조각이나 기존설치의 장르와 연관되어 논의되어져 온 장소성의 문제는 영상이나 드로잉, 기록을 가미한 설치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에서 나타나게 되었고 이론적으로도 정체성, 역사성, 미디어 이론들과 같이 다양한 인문사회과학의 변화를 수렴하게 되었다. 특히 장소성과 연관된 작업들은 전지구화 시대에 국경과 문화를 넘나드는 예술가들의 존재방식이나 설치방식과 맞물리면서 부정적인 의미에서이건, 긍정적인 의미에서이건 이상화된 커뮤니티나 장소성의 개념을 해체하는 데에 사용되어 왔다.

 

국내 미술계에서 반(反)형식주의적이고 기관비평적인 입장에서 장소성과 연관된 조각/설치작업이 덜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면, 상대적으로 참여적이고 행위적인 요인들이 강조된 최근 작가들의 작업에서 장소나 지역정체성에 대한 테마들이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 이에 필자는 인사미술공간에서 열린 백현주의 개인전, 홍원석의 홍성시장 입주작가보고전, 금천예술공장의 그룹전에 선보인 태이의 오프닝 퍼포먼스와 작업을 중심으로 최근 국내 작가들이 기존의 이상화된 커뮤니티나 장소성의 개념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백현주의 <친절한 영자씨>
인미공 1층에서 상영된 <친절한 영자씨>는 2011년 늦여름부터 지난 2년간 작가가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2005)의 주요 배경이 되었던 부산 주례여고 골목근처 주민들과 함께 제작한 것이다. 작가는 대부분 노년층으로 이루어진 개금2동의 주민들이 한사코 박찬욱 감독이 <친절한 금자씨>를 촬영하던 때를 동네의 주요 이벤트로 회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기본 사실들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사실에 큰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가 인터뷰한 총 100명이 넘는 주민들 중에서 실제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본 사람은 단 2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자연스럽게 동네에서 이 영화는 1970년대 중반을 풍미한 <영자의 전성시대>나 <고래사냥>의 춘자를 연상시키는 ‘친절한 영자’씨, 혹은 ‘친절한 춘자씨’로 불리어졌다. 심지어 올해 당시 통장이 나눠준 타올을 발견하기 전까지 주민들은 의심의 여지도 없이 각자가 선호하는 제목을 사용하여왔다. (게다가 2층 전시실에 놓여진 2006년 타올에 감독 ‘박찬욱’은 ‘박찬옥’으로, ‘촬영’은 ‘찰영’으로 잘못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일차적으로는 타지인이 만든 개금2동의 이야기가 아니라 주민들이 목격한 영화촬영 후기를 바탕으로 제작된 <친절한 영자씨>를 선보이고, 두 번째로는 지역주민들이 자신들의 장소성에 대하여 이해하고 과장하며 왜곡하는 과정을 작가가 직접 기록한 스케치, 시나리오, 인터뷰, 기타 자료들과 함께 보여주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친절한 영자씨> 속 배우의 행동들은 개연성이 결여되어 있고, 부자연스러우며, 반복적이다. 예를 들어 등장인물들은 싸우다가 갑자기 흩어지기도 하고 다시금 달려가서 덤비기도 하게 되는데 이 장면은 얼핏 보기에는 <친절한 금자씨>에서 주인공 이금자와 백선생의 청부살인업자가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들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친절한 영자씨>는 촬영장면의 순서와 전개를 혼돈하거나 불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주민들의 증언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심지어 작가는 이영애를 <친절한 금자씨>의 이금자가 아니라 장금이로 기억하고 있는 코믹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자 이금자를 연기하는 여자 배우가 난데없이 한복을 입고 나오는 장면도 연출하였다.

 

이와 같이 거주민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촬영현장에 초점을 맞추는 백현주의 <친절한 영자씨>는 일차적으로는 영화의 배경으로 축약된 개금2동의 장소성과 주민들의 존재감을 회복하려는 시도로 보여진다. 그러나 동시에 2년 동안 행해진 인터뷰에서 주민들이 자신들의 증언을 계속 번복하거나 모순되게도 오히려 영화를 통하여 지역에 대한 자긍심을 지니게 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개금2동의 장소성을 규정하는 방식에 대하여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즉 우리가 영화나 매체를 통하여 접하게 되는 단편적인 지역의 모습만큼이나 지역주민 스스로가 지역적인 정체성, 장소성, 커뮤니티를 규정하는 방식도 끝없이 재생산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것이다.

 

연령대가 높은 개람2동의 주민들은 예술영화보다는 일상적인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즐긴다. 이영애, 영화 속 이금자, 장금이를 동일한 인물로 혼돈하는 지역 주민들은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동네가 영화의 부분이 되었다는 사실에 엄청난 자부심을 느낀다. 피난 이후부터 살아온 주민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민들은 보기에는 매우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다. 그러나 결국 물리적으로나 계층적으로 이동이 용이하지 않은 그들에게 영화의 세계, 영화배우는 환상 그 자체이다. 자신의 동네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부풀리기에 이만큼 좋은 소재가 없는 셈이다.

 

<친절한 영자씨>의 마지막 장면들에서 작가는 골목 그 자체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그는 영화의 초입부에서 등장인물을 찍고 자동차를 찍고 다시 인물을 클로즈업을 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과 각도에서 골목을 찍되 사람을 배제시킨다. 여기서 등장하는 장소성은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간의 흔적을 지워버린 장소성이다. 그러나 동시에 백현주는 상업적인 조명과 카메라 렌즈, 필름을 사용함으로써 결국 백지상태의 장소성 자체도 허구이며 모든 장소에 대한 서술은 영화 속 한 장면과 같이, 그것이 상업영화에서이건, 예술영화에서이건, 기억에서이건 간에 지속적으로 재구성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지시켜준다.

 

홍원석의 <규호산책>
백현주의 작업이 지역주민들과 함께 주례여고 골목의 장소성, 개금2동의 지역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다루었다면, 홍원석은 <규호산책>에서 지역주민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거의 배제하고 있다. 아트 택시를 운전하면서 제주도 가시리 마을 주민이나 경북 영천의 어르신들과 소통하는 “착한” 면모대신에 작가는 홍성시와 주위풍경을 관찰하면서 비교적 수동적인 위치에 놓여 있게 된다. 영상작업은 자신의 아버지가 홍성시장 내에 위치한 레지던시에서 나와서 홍성의 시내를 거니는 모습을 주로 뒤쪽에서 따라가면서 기록한 결과이다. 작가가 이제까지 커뮤니티에 직접 뛰어 들어가서 ‘어르신들’을 도움으로써 자신과 커뮤니티의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였다면 <규호산책>에서는 산책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특정한 장소, 커뮤니티와의 거리감을 중시하고 있다. 규호산책에서 ‘규호’는 작가 아버지의 호이기도 하지만 작가가 느리게 걷는다는 한자어를 사용해서 부쳐진 것이다.

 

작가는 ‘규호산책’을 박지원의 18세기 저서이자 여행기인 『열하일기』(1780-83)에 비교하기도 한다. 물론 18세기 말 청나라 황제의 특별도시이자 중국에 신문물이 들어오는 통로였던 열하와 이제 막 개발의 문턱에 들어선 홍성시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에 덜 잘 알려진 도시의 문물을 구경한다는 의미에서 작가는 박지원과 자신의 역할을 동일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작가는 충남 도청소재지로 선정된 이후에 서서히 변화를 겪고 있는 홍성시에 매료되었다. 홍성시는 계획대로라면 2015년까지 충남도청 소재지의 주요 건물들이 완공되고 신도시 개발이 진행되어지게 된다. 이러한 기대감 때문에 세종시와 유사하게 이 근처의 땅값이 많이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느리게 걷는 아버지의 뒤를 쫒으면서 작가가 관찰한 홍성시는 대부분의 인구들이 노년화 되어 있고 환경이 낙후해서 도시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평온한 농촌도 아닌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작가 입주프로그램이 위치한 재래시장도 본격적으로 홍성이 도청소재지로 발전되고 각종 대형마트들이 들어서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홍성시 외곽의 모습은 더 기이하다. 작가는 차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독립운동가 김좌진의 생가와 근처에서 보수적인 정치성향의 ‘바르게살기 위원회’에서 나와서 데모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김좌진의 생가가 홍성에 있기는 하지만 김좌진과 같이 진취적인 인물상을 내세우기에 홍성시는 작가의 견해로는 장소성이나 정치색이 강한 곳이 아니다. 흥미로운 점은 영상에서 홍성시의 풍경은 수려하지도 않고 적당한 흙빛 속에 묻혀버려져 있다. 그리고 작가는 데모하는 광경을 그다지 확대해서 클로즈업 하지도 그렇다고 무시하지도 않는다. 단지 매우 조용한 고장에서 일어나는 산발적인 동요 정도로 다룬다. 이러한 측면에서 홍성시는 현대 시대에 와서 그 아우라와 기능성을 상실한 푸코식의 일탈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 of deviation)를 연상시킨다. 물론 푸코식으로 창녀촌, 감옥, 양로원, 병원, 무덤과 같은 공간들을 ‘소외’된 공간으로 따로 분리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반론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인간들은 주어진 공간에 종속될 뿐 아니라 그 공간이 다기능을 하도록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소지하여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홍성시를 헤테로토피아라고 규정하기 보다는 푸코가 지목하고 있는 이러한 공간들의 특징들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발전지향적인 메시지와 낙후된 농촌의 모습이 혼재되어 있고 따라서 분류가 힘들며 애써 존재하지 않는 과거와 미래의 영화를 쫒는 홍성시의 모습은 결국 푸코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완벽하고 조화로운 유토피아적 공간이 지녀야할 것들의 이면, 즉 모순과 갈등이 존재하는 공간을 인식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별 관심을 끌지 못하는 김좌진 생가나 시골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시가지 건축이 활발하게 진행되지도 않은 홍성시의 상태는 푸코가 주장하는 헤테로피아적인 특징들에 부합된다.

 

실제로 홍원석은 이미 문래 예술공장 MAP 프로젝트에서부터 주어진 커뮤니티나 장소성에 내재되어 있는 갈등의 역사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문래 예술공장을 찍은 영상에서 갈등의 양상이 표출되지는 않지만 작가는 문래 철공소, 입주작가 스튜디오, 재개발과 연관된 일을 맡은 사무실 등을 돌아다니면서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철저하게 듣는 입장에서 기록된 영상들은 어떻게 서로 다른 이해집단들이 “문래”라는 장소성을 다르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홍원석의 이번 <규호산책> 또한 관객들의 공간에 침투하고 그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 이외에 주어진 공공, 장소성의 의미를 보다 분석적이고 비평적으로 접근해가는 작가의 최근 변화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태이의 <잠 물결>
백현주와 홍원석에게 커뮤니티나 장소성은 작가들 스스로의 정체성 문제와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지는 않는다. 반면에 여성주의적인 관점의 작업을 발표해온 작가 태이에게 그가 중요한 매개체로 소개하고 있는 침대는 성(性)정치학적인 의미를 지닌다. 2008년에 열린 《언니가 돌아왔다》전에서 태이는 영국의 여성운동가와 나혜석, 그리고 우리시대의 여성미술작가를 잇는 중요한 모티브로 침대를 등장시켰고, 필로우 토크(베겟머리에서 나누는 이야기)와 같이 울스턴크라프트와 나혜석이 나누는 가상의 대화를 벽면에 적어놓았었다. 금천예술공장의 커뮤니티 리서치 그룹전 오프닝에서 선보인 퍼포먼스, '잠물결‘ 에서도 침대가 등장한다. 안양천과 금천 전시장에 일종의 UFO와 같이 뜬금없이 등장한 침대는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대가 조우하도록 만드는 상징적인 수단이면서 우리 사회의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는 여성작가 자신의 처지와 나아가서 현대인과 장소성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가장 포근하고 사적인 일종의 집과 유사하게 여겨져야 할 침대는 더 이상 안정적이지도 편안하지도 않은 공간으로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태이가 안양천에다가 침대를 띄우게 된 것은 안양천이 지닌 물리적인 여건과 태이가 구현하고자 하는 침대의 이미지가 부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안양천은 도심을 가로지르는 가장 큰 개천중의 하나이며 영등포, 구로동, 문래동 일대 공장들의 중요한 터전이어 왔다. 현재 안양천은 철새들이 서식할만큼 그 상태가 호전되었고, 현재 공원도 조성되어 있지만 금천 주위의 안양천은 강변을 둘러싼 고속도로들 때문에 일반인들의 접근성이 떨어지거나 관심 밖의 지역으로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안양천은 폭이 매우 넒은 곳으로부터 그렇지 않은 곳까지 지형이 다양해서 작가에 따르면 침대가 쉽게 좌초하게 된다. 실제로 매우 불안정하게 떠내려가거나 정지하는 흰 침대의 모습은 쉽게 인근을 지나는 사람들의 관심과 반응을 이끌어내었다. “모험을 의미하냐,” “아픈 할머니가 떠내려가는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냐”등의 반응은 관객들이 침대의 움직임을 매우 정서적으로 인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안양천의 떠내려가는 침대가 ‘불안전한 운송수단’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면 금천에서 열린 오프닝 이벤트에서 침대는 연극무대로 탈바꿈 되었다. 몸을 뒤척이는 불면증 환자, 늦은 밤에 여흥을 즐기고 돌아온 여장남자 연인들, 침대공간을 확보하기 위하여 미묘한 쟁탈전을 벌이는 세 명의 여인들, 관객들 사이에서 튀어나와 자신의 침대에서 휴식을 취하고자 하는 남자와 여자 연기자들은 매우 사적인 행위와 공간에 대한 관객들의 관음증적(voyueristic)인 욕구를 충족시킨다. 하지만 여장을 풀어헤치는 동성애자들의 모습을 목격하게 만들고, 여성들이 침대공간을 더 차지하기 위하여 경쟁하고, 잠을 이루지 못해서 안달복달하는 남성의 모습 등은 침대가 여성이나 성소수자들에게 더 이상 편안하고 안락한 은신처가 아니고, 현대인들에게도 그와 같은 현상은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실제로 사적인 공간이나 권리는 개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의 표상이면서도, 정치적, 경제적 권력이 약자를 도덕이나 공공의 이름으로 탄핵하며 단죄할 수 있게 만드는 이율배반적인 속성을 지닌다.) 즉 침대 위에서 펼쳐지는 에너지와 미묘한 갈등관계는 관객으로 하여금 침대를 더 이상 편안하고 안전한 사적 공간으로 여기지 못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태이의 “침대”를 이용한 퍼포먼스와 설치작업은 여성이나 성소수자의 관점에서 그들의 사적인 경험과 공간에 대하여 일반 관객들이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안양천에서 목적지 없이 부유하는 흰 침대의 이미지는 편안한 집과 같은 공간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욕구가 쉽게 충족될 수 없음을 암시한다. 태이의 침대는 마찬가지로 주위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재개발된 아파트의 이미지들과 함께 뿌리 없이 방황하는 노마딕한 장소성의 또 다른 현현인 셈이다.

 

장소성을 다룬 예술에 대한 제언
소개한 작업들은 고전적인 의미에서 물리적으로, 보다 정확하게 꼭 집어서 특정한 장소에 설치를 하거나 특정한 지역의 역사만을 다루지는 않지만 장소성을 다양한 테마들과 연관시켜 다루고 있다. 백현주는 지역 정체성이 미디어 문화를 통해 재현되고 다시금 이러한 기억들이 지역의 구술사에 등장하게 되는 과정을, 홍원석은 작가지원프로그램이 점차로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이전에는 현대미술에서 덜 자주 등장하였던 지역 중소도시의 풍경을, 태이는 침대라는 소재를 통하여 사회적 타자들이 기존 사회, 혹은 해석하기에 따라서 도시 속 환경에 안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현상을 그려낸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커뮤니티 참여 작업이나 리서치 과정을 동반한 작업들이 지원을 받고 있는 현 미술계 상황에서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특히 백현주의 부산이나 홍원석의 홍성시는 지나치게 수도권 중심으로 도시공학적이거나 비판적인 테마를 다루어온 국내 미술계에서 신선하게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소성을 소재로 한 작업들은 공통적으로 작가가 특정한 커뮤니티와 지역의 상황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수집한 자료들을 어떻게 쉽게 관객에게 전달하면서도 작업에 녹여낼 수 있는가의 고민거리들을 안고 있다. 개인전 2층에 백현주가 지난 2년간의 모은 자료들을 설치하고 홍원석이나 태이가 영상, 퍼포먼스, 설치 등의 다매체적인 수법을 사용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필자 또한 비평문을 쓰면서 작업 자체보다는 연관된 지역이나 장소에 대한 설명으로 지면을 할애하였다. 이러한 정보들이 작가의 의도나 작업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필수적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어진 커뮤니티에 대한 보다 복합적이고 때에 따라서는 비판적인 해석을 도입하게 될 경우에 배경지식은 더욱 중요해진다. 물론 이와 같은 문제가 비단 장소성을 테마로 한 작가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관이나 전시장을 찾는 관객들과의 가장 중요한 소통수단이 ‘시각적인 경험’이라는 점과 현대미술이 넓은 대중과 쉽게 소통하기에는 결코 친숙하거나 쉬운 예술적 장르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게 되면 많은 배경지식을 어떻게 축약하고 무엇보다도 작업을 통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 것인가의 문제는 앞으로 이들 작가들이 해결해야할 중요한 과제이다.

© 2018. Koh, Dong-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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