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여기에 없다
You're Not Here

고동연 (미술사가)

"당신은 여기에 없다”는 올해 초 3월 말에 토론토에서 열린 국제 여성미술관련 학회이자 미팅(Feminist Art Conference)의 타이틀이다. “당신은 여기 없다”는 1971년 오노 요코(Ono Yoko)의 개인전으로부터 1990년대 뉴욕 공공미술 단체들에 의하여 사용되었던 구호와도 유사하다. 관객의 의식을 환기시키고자 할 때마다 등장하는 구호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당신 스스로의 존재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곳에 몸은 존재할지 모르지만 무심한 채로 주위와는 무관하게 돌아가고 있는 ‘당신’의 의식을 새롭게 붙잡기 위한 구호이다. 필자 또한 한국 현대미술에서 여성미술이 어떠한 위치에 놓여 있는지에 대한 독자의 관심을 환기시키고자 이 구호를 사용하였다. 과연 한국에서 여성미술이 존재하는가? 한다면 그것은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여 왔고 존재해야만 하는가? 


최근 한국 여성미술의 선구격인 윤석남의 개인전이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현실이 있다. 연일 성폭행이나 성추행에 관한 각종 보도들이 쏟아져 나온다. 과연 무엇이 문제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한국 여성미술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가? 필자는 특정한 작가들을 소개하고 그들에 대하여 평가하는 대신에 지난 20년간 한국 여성미술과 연관된 비평적, 예술적 시도들을 재점검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한국 여성미술의 과제와 문제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 여성미술의 발전상황에 대한 관찰과 제언
1. 첫 번째로 현재 한국 미술계에서 여성미술을 다루는 작가들의 존재감이 부각되지 않고 있다면 젊은 세대 여성 작가들에 의하여, 그리고 남성 작가들에 의하여, 혹은 그 외의 정체성을 자신의 것이라고 믿고 있는 이들에 의하여 성이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더 이상 회자되지 않고 있다고 느낀다면 부분적으로 이러한 현상은 특정한 전통의 부재로부터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좋은 비교가 될 수는 없겠으나 유럽의 한 비평가가 지적한 바와 같이 여성미술이 이론으로서보다는 미술로서 더 활발하게 미국에서 발전된 계기는 선구적인 인물들의 이미지와 그 전통이 역사적으로 계속 회자되고 기억되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국내에서는 윤석남과 같이 선구적인 인물이 있을 테이고 초기 이불의 행위예술에서와 같이 정형화 할 수 없는 괴물로 자신을 재현하였던 충분히 과격하고 충격적이었던 이불의 이미지가 있다. 그리고 한국 현대미술에서 “못된 여자(bad girls)”의 원형은 장지아의 서서 오줌 싸는 여성으로 이어졌다. 

물론 각각의 이미지들이 문제를 지니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못된 여자의 이미지는 자기풍자적일 수밖에 없다. 이불의 괴물은 여성이 괴물이어야만 하는 과격한 상황에 대하여, 그리고 스스로를 강하고 강력한 힘을 지닌 여성으로 환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환영할만하고 장지아의 서서 오줌을 싸는 여자는 직립의 상징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에서 가공할만하다. 하지만 그 가공할만한 힘이 가상의 현실 속에서만 재현되고 있고, 그리고 그것이 충분히 자신을 비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격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된 여자의 이미지는 각 혁명의 순간에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강력한 선례를 남긴다. 

하지만 현재는 어떠한가? 그러한 이미지들이 진부한 여성미술의 한 전략이나 과거의 미술로 치부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성의 몸은 이론적으로 해체되어서 한국 현대미술에서는 터부시된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필자들이 만나본 여성작가들 중에는 자신의 몸을 노출하는 것이 쉽지 않은 국내현실에서 몸을 사용하는 것을 포기해버린다든지 혹은 “저의 미술을 보다 폭 넓게 보아 달라,” 또는 “저의 몸은 여성의 몸으로 한정될 수 없다”라고 항변하는 경우들을 종종 보아왔다. 이 마저도 한국 미술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는 여성의 몸을 ‘힐끗 힐끗’ 다루는 경우들에 한정된다. 2014년 광주 비엔날레에서 외국인 총감독이 자신의 주요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잊혀진 여성 작가들을 발굴하는 일을 계속해 오고 있는데 이불의 초기 행위예술이 다시금 회자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기도 하지만 슬픈 일이기도 하다. 한국 현대미술에서 “나쁜 여자”들의 몸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2. 두 번째로 한국 현대미술에서 몸, 그리고 여성의 정체성과 연관해서 지나치게 이론이나 담론 위주로 현대미술의 전략이 사용되고 교육되며 갈아 치워지는 상황에 대한 염려가 앞선다.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 필자도 일조하고 있을 것이다. 여성학 위주로 여성성에 대한 담론이 회자되는 한국 현대미술, 그리고 나아가서 한국의 인문사회과학 실정에서 여성 미술작가들도 다른 현대미술의 주제(기억, 아카이브, 관객 참여, 예술과 과학)들과 마찬가지로 ‘트렌디’한 전략을 지속적으로 습득하고 활용해야 하는 의무감에 시달린다. 결과적으로 매번 수입된 이론들의 키워드와 결론들이 작가들이나 비평가들에 의하여 식상하리만치 반복된다.

1980년대 나온 다나 하라웨이(Dana Haraway)의 ‘사이보그(Cyborg)’이론이나 1990년대 초반에 나온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이론들이 국내에서는 1960년대 히피세대의 
여성의 몸에 대한 인식, 혹은 미국 내 에이즈(AIDS) 문제로 시끌벅적하였던 역사적 순간들에 대한 인식 없이 단순 키워드들로 축약된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힘을 빌어서 신체적이고 생물학적인 다름을 극복할 수 있다는 유토피아니즘은 1960년대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어온 여성의 몸이 지닌 다양한 속성과 타자화된 지위에 대한 고민의 결과이지 무조건적으로 여성의 몸을 해체하기 위한 시도가 아니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버틀러의 이론은 에이즈 문제로 새롭게 달구어진 성, 성적인 행위에 대한 선택의 문제, 그리고 이를 둘러싼 생물학적 몸에 대한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고민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진정 여성의 몸에 대한 투쟁과 논란의 시행착오가 부재한 상태에서 ‘몸’의 담론이 국내 미술비평계에서나 작가들에 의하여 몇몇의 키워드로 축약되어져 오고 있는 것은 정말 바람직하지 않다. 몸을 부활시키고 그로 인해서 어떠한 문제점들이 유발되는지 논의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실행하여온 투쟁의 역사를 거치지 않고서 몸의 해체를 섣불리 논의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서구로부터 유입된 생리학적이고 이후 정서적인 정체성의 해체에 대한 이론들이 더더군다나 여성의 몸을 다루어야 하는 불편한 상황에 직면한 여성 작가들, 혹은 남성 작가들에게 일종의 방패막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후기 자본주의’시대의 신체적인 변형을 탐구하여온 이형구를 비롯한 많은 이후 젊은 작가들의 작업이 일종의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 것으로 보이는 것도, 몸의 해체와 연관된 사고의 ‘가지치기’가 불가능해진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정확히 논의의 대상이 된 몸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가 비평가들과 작가들에게 부재한 상태에서 몸은 매우 쉽게 한국 현대미술에서 해체의 대상이 되었다.

3. 세 번째로 흔히 포스트페미니즘을 논하고는 한다. 그런데 ‘포스트’라는 접두어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서 포스트페미니즘은 시의 적절한 용어로, 혹은 보수적인 용어로 달리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단어가 마돈나의 노래 <물질적인 여자(material girl)>로 대변되는 매우 자기중심적이고 보수적이며 자본주의 친화적인 1980년대 상황에서 서구의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포스트페미니즘은 우리시대에, 한국 현대미술에서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일단 한국에 골드미스가 등장하였다고는 하나 전국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그리고 스펙에서 동급의 남성들에 비하여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한국의 여성들이 실제로 각종 사회지도층으로 진출하는 사례는 흔치 않다. 게다가 더 문제인 것은 한국에서 교육받은 여성들은 극성스러운 학부모에서 사회진출을 도모하는 커리어 여성의 단계로 이향되지 못하고 있다. 아니 학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하여 직업을 갖는 일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미국의 경우 이러한 인식의 전환이 1960년 여성운동의 주요한 동력이었고 그것이 여성잡지 기자출신에 의하여 선동된 것은 결코 우연적인 일이 아니다.) 게다가 아직 서구 선진국에서도 몇몇 복지국가를 제외하고는 여성의 교육수준에 비하여 여성의 임금이 낮다는 사실에 대한 각종 통계들이 나오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골드미스의 성공이 시사 하는 바를 폄하해서는 안 되겠지만 동시에 그들의 약진이 한국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징표로 읽혀지기 위해서 더 많은 변화들이 일어나야 한다. 

덧붙여서 골드미스의 등장이 한국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일상적인 오해를 불러일으키듯이 1990년대 이후 국제무대에서 성공한 여성작가들의 예들이 한국 여성미술 전체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일찌감치 국제무대에서 활약하여 오고 있는 김수자를 비롯하여 이불, 구정아, 양혜규, 전준호와 짝을 이룬 문경원을 꼽다보면 전 지구화된 미술계에서 한국의 여성작가들이 더 약진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여기서 이들의 성공을 달리 해석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중 몇몇은 국제무대에서 희귀종에 속하는 동양계, 그것도 한국 출신의 여성작가라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별반 여성주의적인 이슈와 연관된 작업을 하고 있다고도 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한국 미술계에서 갖는 ‘포스’는 무시할 수 없으며 자칫 이들이 포스트페미니즘 담론과 엮일 수도 있다. 즉 몇몇의 성공한 케이스들이 그것의 성공경로나 나머지 한국 여성미술과 작가들의 현황과는 상관없이 한국 여성미술계의 성공적인 과업으로 잘못 비춰질 수도 있다. 

4. 마지막으로 여성미술과 연관해서 남성과 여성의 관계, 나아가서 젠더, 성적 취향에 대한 각종 생각들이 더 다양하게 전개되지 않는 상태에서 여성미술의 미래를 논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애초에 정체성에 대한 해체는 단순히 여성의 다름을 삭제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대신 다양한 다름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자면 사고의 전환을 위해서 여성들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즉 계속적으로 나쁜 여성으로 남거나 무관심한 여성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남성성에 대한 보다 폭넓은 담론과 이에 걸맞은 작업들이 등장하여야 한다. 이미 여성 미술의 초기 단계였던 1970년대 여성 작가들의 공동체에서 남성 작가들의 누드를 그렸었고 동일한 시기에 남성 작가들의 자화상이 중요한 장르로 등장하였었다. 즉 남성들의 자기 성찰은 궁극적으로 여성미술이 지향하는 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행위의 전환에 있어서 선행되어져야 하는 과제이다. 그런데 국내 미술계에서는 이러한 시도들이 지나치게 부재한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몇 가지 측면에서 현재의 상황이 우려스럽다. 첫 번째로 미술계는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일고 있는 ‘가장’에 대한 관심은 보수적이고 과거 회귀적이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타자화된 상황에 놓인다. 하지만 과연 누가 더 타자화 되어 있고 사회적 약자인지에 대한 비교 분석의 과정을 삭제한 채 가장들에 대하여 느끼는 사회적인 공감대와 연민이 긍정적인 남성성 연구를 대체할 수는 없다. 두 번째로 현재 일고 있는 갑과 을의 논란과 연관해서 성폭행이나 추행에 대한 보도들이 전해진다. 현재 대중매체들이  남성과 여성의 문제를 개인적인 치정이 아닌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조명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환영할만한 일이다. 단 모든 사회적 쟁점들에 대하여 미술계가 반응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여성미술과 연관된 담론, 비평문, 전시기획들이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침묵을 지키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본다. 

나가는 말: 당신은 여기에 있다.
이외에도 여성미술이 더 풍성하게 국내의 토양에서 자라지 못하는 데에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근본적인 원인 중의 하나는 결국 여성주의를 택할 것인가, 혹은 예술을 택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한편으로 여성주의, 나아가서 정체성과 연관된 테마를 택함으로써 자신의 영역을 스스로 좁힌다는 두려움을 지닐 수 있다. 그리고 아예 성이나 정체성을 다루는 작가들이 문제가 아니라 암암리에 가부장적이고 마초적인 분위기가 비평계에 팽배한 현실에서 그러한 선택이 특히 젊은 작가들에게는 부담스러울 수 도 있다. 그러므로 두 가지 일이 선행되어져야 한다. 필자를 포함한 비평가들이 작가들에게 계속적으로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한국 현대미술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 그리고 남성 작가들의 자기 성찰에 대한 작업들이 새로운 예술계의 동력이자 시급히 다루어져야 하는 주제라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알려야 한다. 그리고 젊은 작가들이 현재 다루고 있는 소재들이야말로 매우 한정된 몇몇의 이론들과 주제에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론적이고 이상주의적으로 들릴 수 있으나 자기희생을 감수하지 않고 도전적인 주제를 선택할 수 없음을 후배 미술인들이 깨달아야만 한다. 최근 윤석남의 전시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당신은 여기에 없다’를 ‘있다’고 바꾸는 일이다. 

『미술세계』, 2015년 5월.

Dong-Yeon Koh, "You're Not Here," Misul Saegye (Art World), May 2015. 

© 2018. Koh, Dong-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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