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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원의 (탈)장소성

 

고동연 (미술사)

 

 

박기원의 장소성이 지닌 이중성

설치나 환경 조각 작업들은 그것이 놓인 장소성(locality)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서구 유럽의 광장에 놓여 있는 기념비들로부터 전통적으로 무덤 앞에 놓여 있는 비석, 그리고 동네 어귀에 마을을 지키는 거대한 나무와 그것을 둘러싼 장식물들에 이르기까지 3차원 작업들은 그것들이 속한 장소의 정치적, 역사적, 심지어 주술적 의미를 새로이 부여하거나 부여 받으면서 발전되어 왔다. 16세기 플로렌스의 우피치 미술관(Uffizi Galleria)에 조각 작품들이 원래의 위치들로부터 이탈하여 전시 되었을 때 서구 미술사에서 논쟁거리가 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에서였다. 마찬가지로 1960년대 서구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나 미술 비평가들도 형식주의가 조각에 있어서 초래한 ‘탈 장소성(translocality)’에 대하여 비난하여 왔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현대 미술에서 장소성, 혹은 '특정한 장소성(site-specificity)'에 대한 각종 해석들은  조각이나 3차원 설치 작업이 놓인 물리적인 환경보다는 사회적인 맥락에 관한 각종 담론들을 끌어들이는 계기를 마련하여 왔다. 조각의 장소성이 ‘특정한 장소성과 비 장소성(site/non-site)’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것이건 간에, 환경 문제와 연관된 장소성을 다루건 간에, 작가의 정체성을 현현하는 한 징표로 사용되던 간에, 1960년대 이후 특정한 장소성과 연관된 담론들은 궁극적으로 장소가 지닌 고정된 의미를 부정하는데 중점을 두어 왔다. 장소성이 작품에 부과하여온 이데올로기적, 역사적, 미학적 의미를 부정하고 오히려 작업에 의하여 형성되는 장소성의 의미를 다양하게 해석하려는 의도에서였다. 1)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살펴보자면, 1990년대 이후에 등장한 박기원의 작업은 생뚱맞다. 일차적으로 그의 작업은 고정된 ‘물리적’ 장소성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듯이 보인다. 2002년 가람화랑에서 한옥의 서까래를 그대로 내보이면서 비닐로 한옥의 천정 내부를 모두 감싸거나, 2003년 사루비아 화랑의 지하 벽면에  바니쉬를 일정 높이까지 칠한 작업 등에서 작가는 주어진 벽, 천정, 바닥의 여건에 따라 자신의 창조적인 활동을 한정시킨다. 이번 박기원의 설치 작업도 국립현대 미술관의 중앙홀을 “싸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장소성에 대한 박기원의 관심이 단순히 작품이 놓인 특정한 장소의 물리적이고 고정적인 속성에만 맞추어져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2006년 <파멸(Ruin)>이나 2007년 스페인 소피아 미술관의 내부 벽면을 산업용 기름으로 가득 메운 <라이트 웨이트.(Light Weight)>에서 특정한 장소성보다 전체 공간의 이미지가 하나의 ‘그림’과 같이 관객에게 다가오게 된다. 2) 즉 타버린 건물을 연상시키는 <파멸>의 내부와 천상의 색인 노란색으로 그득 메워진 소피아 미술관은 관객들로 하여금 상징적인 차원에서 장소성을 초탈하여 작품을 바라보도록 한다. 3) 이것은 작품이나 관객의 몸이 현존하지만 이미 그 물리적인 환경으로부터 이탈함으로써 얻게 되는 초월적인 경험의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박기원의 작업은 장소성에 귀의하고 있지만 동시에 장소성과 모순된 관계를 유지한다. 그의 작업은 공간이나 물리적인 맥락을 부각시키지만 이내 그의 작업이 주어진 장소에 귀속된 것이 아니며 영원히 남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인지 시켜준다. 이러한 측면에서 필자는 박기원의 설치 작업이 장소에 귀속된 것도, 완전히 이탈한 것도 아닌 중간자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해석하고자 한다. 흡사 하이데거(Heidegger)가 고향이란 결코 갈 수 없으나 언제나 가고 싶어 하는 곳이라는 고백한 것처럼 박기원의 작업 또한 작품과 장소의 완전한 만남이 과연 가능한가에 대하여 질문을 던진다. 4)

 

벽의 예술

“프레임은 위기 상황에 놓여 있는 결정적인 구조이다. 왜냐면 그것은 의미의 내부와 그것의 부수적인 경험적인 측면 사이의 보이지 않는 경계 (혹은 그 중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회화의 진리(Truth in Painting)』(1987).5)

 

 

“저는 벽이 투명하다고 생각해요.”

박기원, ‘작가와의 인터뷰,’ 2010.

 

 

박기원의 작업에서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벽이다. 그는 설치 작가이지만 그다지 질감이 부각된 두터운 재료를 사용하지도 않고 건축의 복합적인 구조를 이용하지도 않는다. <수평(Level)>(2002)이나 <깊이(Depth)>(2003)와 같은 작업에서부터 장소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더욱 심화된 경우에도 그의 관심은 주로 “벽”이라는 건축물의 한 부분에 집중되어져 왔다.  

 

벽을 위주로 설치된 박기원의 작업은 결과적으로 관객들에게 그의 작업이 주어진 공간에 최소한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벽에 바니쉬를 바른다던지, 투명한 비닐을 서까래 주위로 씌운다던지 하는 등의 작업 방식은 실내의 중앙에 거대한 작품을 설치하거나 건축의 부분을 변형시키는 과정을 수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6) (실제로 2005년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회 당시 많은 관람객들이 실내와 실외를 둘러 감싼 자신의 작품을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쳤었다고 작가는 증언한다.) 최근 기무사에 설치되었던 <부메랑(Bumerang)>(2009년)도 3층 복도를 에워싼 플라스틱 거울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박기원의 작업이 어떠한 형태의 변형과도 연관되지 않고 그저 '뭍혀간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면 박기원의 작업은 이내 공간으로 확장되어 환영적인 효과를 창출해 내기 때문이다. <부메랑>에서 벽은 내부 공간을 반사해 낸다. 그러나 동시에 플라스틱 거울의 폭에 따라 잘려서 반사된 이미지는 복도의 실내 공간을 반사하면서도 비튼다. 반사를 통한 확장과 왜곡이 만들어내는 심리적인 효과는 보는 이로 하여금 박기원의 작업이 내부의 공간을 확장하면서도 괴이하게 억누르거나 축소화 한다는 인상을 준다.

 

작가는 벽을 투명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하여 투명한 재료 대신에 상징적이고 환영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그는 스페인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Museo de arte Reina Sofia)의 회벽이 너무 무겁게 보인다고 하여 벽을 모두 기름으로 덧칠해 버린 적이 있다. 여기서 노랗게 칠해 버린 벽으로 인하여 내부 공간은 광채를 발하게 되었다. 회벽은 일차적으로 발라진 기름의 물질성으로 인하여 그 벽의 존재가 더욱 강화된다. 그러나 동시에 벽 위에 덧발라진 유동적인 노란색의 산업용 기름은 벽와 이중적인 구조를 이루면서 겉돈다. 벽 위에 칠해진 기름 덕택에 벽은 모순되게도 덜 물리적으로 보인다. 유리 창 너머로 보이는 희미한 이미지와 유사하게 벽은 변형되어 나타난다.

 

박기원의 작업에서 드러난 벽의 이중성은 결국 벽이라는 개체가 지닌 존재론적인 상황과 연관된다. 벽은 건물의 외부와 내부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데라다가『회화의 진실』(1987)에서 설명한 프래임과 유사해 보인다. 데리다는 회화의 액자에 해당하는 프래임이 내적인 의미(그림에 내용)와 그 외부에 해당하는 모든 경험적인 측면을 규정하는 ‘보이지 않는 경계(the invisible limit)’라고 규정한다. 즉 벽은 건물의 부분이지만 동시에 외부의 공간과 내부의 공간을 구획 짓는 수단이다. 따라서 벽은 내부 공간에 속한 것일 수도, 그러나 동시에 외부공간으로 나아가는 일종의 통로로도 여겨질 수 있다. 벽이 불투명성과 투명성의 이중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는 것도 이와 같은 연유에서이다.

 

장소성과 탈 장소성

박기원이 벽이라는 건축의 구조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나아가서 장소성과 그의 작업이 맺어 온 모순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도 중요하다. 만약 불투명한 벽이 폐쇄된 공간성을 강조하게 되는 경우 그의 작업은 전적으로 물리적인 공간에 귀속된 것이 된다. 그러나 반대로 그의 벽이 투명하다면 그의 작업들은 이미 현존하지만 주어진 장소로부터 이탈하고 초월하려는 속성을 지니게 된다.

 

소피아 미술관의 예로 돌아가서 노란 색은 서구 미술사에서 천상을 상징하는 색상으로 여겨져 왔다. 실제로 박기원의 작업에서도 노란색은 전체 공간이 외부로 팽창되어가는 인상을 빚어낸다. 산업용 기름, 바닥에 놓인 비닐의 투명한 재료들은 비물질성을 재현해 내는 재료들로 변모하게 된다. 특히 바닥에 깔려 있는 비닐 백 등은 더 이상 현현이나 현존이 아니라 현존 속에서 초월, 혹은 비물질적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조성해 낸다.

 

이와 같이 장소성을 이탈한 듯한 경험을 제공하는 작업으로 <파멸>을 빼놓을 수 없다. 작가는 태워진 집을 지나치면서 묘한 희열을 느꼈고, 무늬목 위에 불탄 나무의 흔적을 모방하여 검은 먹물을 들이기 시작하였다. 과연 태워진 집들의 흔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파멸의 방은 독일 표현주의 작가 안젤름 키이퍼(Anselm Keifer)의 유명한 그림을 연상시킨다. 암울한 수용소나 불타버린 집을 연상시키는 실내에 검은 무늬목이 벽은 물론이고 천장과 바닥을 덮고 있으며, 사람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무늬목의 부분들이 뜯겨난 흔적이 남아 있다.

 

박기원은 모든 것이 사라진 듯한, 다시 말하면 순간적으로 시-공간을 초월한 경험을 ‘제로의 경험’이라고 설명한다. 7) 부연 설명하자면 작업이 처한 물리적인 장소성으로부터 이탈하여 일시적으로 초현실적인 경험을 제공하게 되는 과정을 가리킨다. 특히 2006년 <파멸>을 계기로 박기원은 환영적이고 상징적인 효과를 더욱 빈번하게 사용해 오고 있다. <파멸>이라는 극적인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그의 작업은 얌전하다기 보다는 강렬하고 심지어 파괴적인 속성마저 지니게 된다.  

 

‘제로의 경험’과 공공 조각

이번 국립 현대미술관에 전시 중인 박기원의 <배경(Scenery)>에서 장소성 만큼이나 관객이 순간적으로 그 장소로부터 이탈하고 자신을 잃어버리는 ‘제로의 경험’이 중요하다. 박기원은 이러한 효과를 위하여 대리석 흉내를 낸 비닐 시트지를 제작하였다. 그리고 시트지들은 미술관의 구조에 따라서 부쳐지게 된다. 하지만 엇갈려 붙여진 시트지들은 실제적인 구조물의 내부를 감추는 역할도 한다. 다시 말해서 작가는 장소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벽과는 상관없이 대리석이 교차하는 면들을 부침으로써 독자적인 입체감이 조성한다.

 

공간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도 박기원의 <희미한(Dim)>은 흥미롭다. 8) 장소성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으로 장소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작가는 철사와 같은 종류의 물건을 바닥에 진열해 놓는다. 여기서 철사들이 놓여지는 형태나 규모는 주어진 공간이나 장소의 여건을 따른다. 그러나 철사들은 이내 시각적으로 주어진 공간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철사가 깔린 바닥면은 작가의 주장에 따르면 안개를 걷는 기분을 미술관 안에 재현해 내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주는 장소적인 제약을 벗어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박기원의 작업이 지니는 장소성과의 모순된 관계는 그의 공공 예술 작업에서도 엿보인다. <자, 넓이(Here you go, width)>(2003)는 형태에 있어서 1965년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가 뉴욕 그린 화랑(Green Gallery)에 전시하였던 미니멀 조각을, 예술적 의도에서는 1960년대 말 스콧 버튼(Scott Burton)과 같은 작가들이 행위 예술로부터 발전시킨 가구 조각, 혹은 기능적인 공공조각을 연상시킨다. 복잡한 도심의 한 복판인 서울역 앞에 놓인 <자, 넓이>는 얼핏 보기에 배치되어 있다기 보다는 무심하게 내던져 있는 듯이 보인다.

 

역에서 내려오는 계단 앞에 설치된 공공 조각은 이제 막 계단을 내려온 사람들을 자극한다. (서울시는 노숙자들이 앉지 못하도록 이후에 팔걸이대를 설치하였다.) 역이란 결국 긴 여로를 준비하고 마치는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 아닌가. 그의 <자, 넓이>는 조각이나 설치 작업이 영원히 한 장소에 머무를 수 없듯이 한 장소에 머무를 수 없는 여행객들을 준비시킨다. 따라서 그의 공공조각은 장소의 물리적인 속성보다는 심리적이고 상징적인 맥락에서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대중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근원으로 돌아오다.

"완숙한 시성의 단계(Poethood)에 들어선 시인의 모든 시는 결국 근원으로 돌아오기(homecoming)를 위함이다.”

하이데거,『존재와 시간(Existence and Being)』(1949) 9)

 

 

박기원의 설치작업은 주로 특정한 장소성에 관한 담론과 연계하여 이해되어져 왔다. 하지만 그의 설치 작업은 이차원적이며 환영적이고 그다지 즉물적인 속성을 강하게 지니지도 않는다. 조각의 공공성 문제에 있어서도 그의 작업은 사회 개혁적, 혹은 참여적이라기보다는 도피적인 성향마저 보인다. 그의 설치 작업을 기능성을 강조한 공공예술로만 정의 할 수 없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박기원의 작업에서 장소성 만큼이나 탈장소성이 주요한 주제라면 이것은 결코 그의 작업에만 한정된 문제는 아닐 것이다. 결국 작업의 의미는 장소성과의 끝없는 투쟁을 통해서 생성된다. 1960년대 유물론적인 사고를 가진 프로세스 작가들이나 미술관이라는 제도권을 비난하려고 하였던 개념미술작가들이나 1970년대 자연으로 나아가서 자연과 인간관의 조우를 탐구하면서 ‘장소성과 비장소성’을 탐구하였던 작가들이나, 이후에 디지털 시대에 맞게 장소성이나 정체성의 문제를 새로이 탐구하는 작가들 모두 결국 특정한 장소성을 이용하되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역사적, 미학적 의미를 재현하고 규정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인지하여 왔다. 10)

 

장소성과 작업간의 관계는 하이데거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결국 우리의 환경을 인식하는 과정과도 연관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자신의 환경을 떠나기 전에 우리는 자신의 환경, 장소, 집에 대하여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바라볼 수 없다. 따라서 집으로 돌아온다는 말, 혹은 집을 바라본다는 것은 결국 방랑객에게만 해당하는 경험이다. 11) 하지만 방랑객은 결코 집에 돌아올 수도 없고 안주하는 것은 더욱 힘들다. 만약 장소성으로의 회귀가 영원히 성취될 수 없는 것이라면 동시에 그것을 향한 끝없는 도전이야말로 3차원 작업을 통하여 작품과 장소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 될 것이다.

 

『현대미술의 스튜디오에서 환경으로』(2004)의 저자 글레어 도허티(Claire Doherty)가 주장한 바와 같이 장소성이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하던지 혹은 한계 상황이 되던지 간에 작품이 놓인 맥락은 결국 작품과 예술가가 만나게 되는 일종의 한 토대가 되며 작품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12) 물론 그 장소가 작가에게, 그리고 사회에게 던져주는 의미에 대한 해석은 그것이 일관되고 고정된 것이 아닐지라도 작가와 관람객이 계속 모색해야갈 과제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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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소성과 확대된 장소성에 관한 전문 이론서들은 다음과 같다. Erica Suderberg(ed.), Space, Site, Intervention: Situating Installation Art (2000); Miwon Kwon, One Place after Another: Site-Specific Art and Locational Identity (2002); Claire Doherty, Contemporary Art from Studio to Situation (2004); Grant H. Kester, Conversation Pieces: Community and Communication in Modern Art (2004)

2) 박기원의 <파멸>은 2009년 기무사에 동일한 제목으로, 그리고 <라이트 웨이트>는 2008년 서울 삼성 리움미술관의 ‘여백의 발견’ 전시회에서 <진공>이라는 제목으로 재설치 되었다.

3)이와 같은 경험은 1960년대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가 미니멀 조각의 즉물성에 반하여 주장한 시-공간을 초월한 특정한 경험과도 유사하다. 하지만 얼마만큼 박기원의 작업이 형식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상화된, 즉 실제적인 시-공간을 초월한 경험과 연관되는지는, 혹은 서구 형이사학이 지닌 몸과 정신의 이분법에서 정신을 우선시하는 태도와 연관되어 있는지는 미지수이다.

4)근원에 관한 하이데거의 논고는 그를 해체주의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데에 있어 주요한 단서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이와 같은 관점은 고향이나 근원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려는 의도를 지닌다기 보다는 근원이나 고향에 대하여 짙은 향수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5)Jacques Derrida, Truth in Painting (trans G. Bennington &i. Meleod) (Chicago and Lond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 p. 62

6)2002년 가람화랑 전시회에서 선보인 박기원의 색연필 드로잉들은 대부분 색면을 교차시켜서 만들어 진 것들이다. 작가의 3차원 작업들에서도 일정한 면들을 지속적으로 겹치면서 새로운 형태가 드러나게 된다.

7)박기원, ‘저자와의 인터뷰,’ 2010년 3월 11일.

8) ‘희미한’이라는 작품 제목은 “어렴풋이 희미한 안개 속을 산책하는 듯한 모습”에서 유래되었다. 박기원, ‘저자와의 이메일 인터뷰,’ 2010년 3월 22일.

9)Martin Heidegger, Existence and Being (London: Vision Press, 1949), p. 253.

10)특정한 장소성에 대하여 집착하는 복고적인 성향은 오히려 점차로 고정되고 영속적인 자아, 민족, 지역의 개념이 국제화 시대에 사라지는 것에 대하여 저항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1)Heidegger, Existence and Being, p. 279.

12)Doherty, Contemporary Art from Studio to Situation, p. 7.

 

© 2018. Koh, Dong-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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