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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진의 치유와 초탈을 위한 ‘남녀 상열지사’:

신기(神氣)를 담은 물건의 성상화(Icon)

고동연

김은진과 성상화의 전통

러시아 정교의 전통에서 이콘(Icon), 혹은 성상화는 단순히 그림이 아닌 경배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성상화에서는 관람객과 그림 간의 교감을 극대화 시키기 위하여 배경의 세부 묘사가 최대한 배제되었고 이에 반하여 중앙의 성모, 성자, 혹은 성인의 모습은 멀리서도 쉽게 알아 볼 수 있도록 클로즈업 되었다. 동양화가 김은진의 작품은 성모 마리아 상이나 대표적인 순교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린 모습만을 부각시키는 성상화의 구도를 연상시킨다. <치유>(2003)에서 전체 인삼의 무정형적인 듯이 보이는 형체는 이내 사람의 전신상을 연상시키면서 화면의 중심에 직립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불쌍하게 생각하다>(2005)에서도 목이 부러지고 머리가 한 쪽으로 기운 인형은 허공에 내던져져 있다. 어떠한 물리적인 배경이나 이야기와도 연관되지 않은 채 인형은 덩그러니 공중에 매달려져 있다.

 

물론 여기서 김은진의 소재들은 성상화의 주제들과는 명백히 달라 보인다. <불쌍하게 생각하다 >에서와 같이 손상되고 더러워진 인형의 모습이나 <개가죽과 지팡이>(2004)에서와 주교의 옷을 입고 있는 얼굴 없는 성직자의 모습은 이콘이 전달하고자 하는 이상적이고 기독교적인 가치관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업에는 성상화에 비견할 만한 몇 가지 요소들이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첫째로 그녀가 재현하고 있는 인삼, 인형, 기이한 여성의 모습, 인간 신체의 부분들은 지속적으로 그녀의 작품들에 등장하면서 작가만의 도상(iconography)을 이룬다. 그리고 그러한 도상들은 전혀 물리적으로 개연성이 없는 공간에 놓여지게 됨으로써 궁극적으로 일종의 아이콘과 같이 등장한다.

 

둘째로 성상화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특정한 대상을 개념화하고 알아보기 쉬운 형태로 간략화 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상화에서 다루어진 대상은 일상 생활에서 실제로 보고 느끼는 특수한 대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유형화된 대상에 가깝다. 그러다 보니 성상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형태나 묘사는 대상이나 이야기의 가장 극적인 순간이나 특징적인 부분만을 전달하는 축약된 형태로 남게 된다. 예를 들어 성상화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예술님의 책형 이미지는 예수님의 고난에 관하여 잘 알려진 나레티브 중에서 절정에 다다른 한 순간만을 포착한 것이다. 즉 부분이 전체를 상징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김은진의 <心中常有  마음 가운데 항상 늘 그러한게 있다>(2009)에서도 인간 신체의 한 부분에 속하는 심장은 전체 생명력이라는 상징적인 의미 이외에도 살아서 꿈틀거리고자 하는 인간 전체의 형상을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왜 김은진은 자신의 소재들을 성상화에서와 유사한 방식으로 다루고자 하는가? 그는 왜 인삼이나 인형으로부터 인종적으로 혼성되어 보이는 눈이 큰 여인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자주 사용하는 소재들을 단순히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무엇인가 경배되고 강렬하게 정서적으로 관람자를 자극하는 대상으로 다루고자 하는가? 그리고 이를 위하여 전체가 부분을, 그리고 부분이 전체를 상징하게 되는 실은 비 논리적인 성상화의 미학적 수법을 사용하고 있는 작가의 의도는 무엇인가?

 

성상화의 혼동된 세상: 전체/부분, 안/밖이 바뀌다. 

성상화에서 전체와 부분을 혼동시키는 미학적 수법은 결국 그것이 지닌 특정한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함이다. 성상화는 특정한 사건이나 대상을 ‘있었던 그대로’ 혹은 ‘본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대신 성상화는 무엇보다도 보는 이의 감수성을 자극하기 위하여 그려지고 보존된다. 그러므로 성상화는 지나치게 사실주의적이거나 개연성을 갖출 필요가 없다. 대신 작품은 그것을 바라본 관객들로 하여금 강렬한 정서적 반응, 즉 신의 존재를 경험할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실제로 러시아에서 신도들은 집의 한 구성에 성상화를 설치해 놓고 매일 경배를 드린다. 우리나라의 부적처럼 성상화는 초월적인 기운[氣韻]을 내포하고 있는 ‘물건’이 된다.

 

김은진의 작품에서도 특정한 물건들이 다루어지고 재배열되는 방식은 결코 논리적이지도 서술적이지도 않다. <주름의 마리아>(2007)에 등장하던 인형의 모습은 독립적인 이미지인 동시에 거대한 치마의 한 부분을 이룬다. 또한 그녀의 하체는 다시금 전체 옷자락의 부분이 된다. 독립적인 개체였던 이미지는 짙은 붉은 치마 주름에 파묻히면서 부분을 이루게 된다. 유사한 아이콘들은 특정한 시, 공간을 암시하는 배경과는 무관하게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서로 다른 그림들에서 전체가 되기도 하고 부분이 되기도 한다. 또한 <달콤한 배>(2006)나 <제단>(2009)에 등장하는 산수 풍경은 <남녀상열지사 1>에서 각각의 돌산이나 수석으로 축약되고 진열장대에 배열되어 있다. <남녀상열지사 1>나 <안녕하세요?>(2009-2011)에서 골동품 상을 연상시키는 진열장 위에는 산들의 작은 모형들이 선반 위에 놓여 있으며 이외에도 작가가 자주 사용하는 각종 아이콘들이 차례로 배열되어 있다. 게다가 징그럽게 생긴 심장은 일종의 ‘장기’와 같이 선반 위 한 자리를 차지한다. 다시 말해서 아이콘의 예수님 상이 더 이상 기독교의 특정한 교리를 설명해 내는 수단이 아니라 신의 영기를 받은 일종의 물건이 되듯이 김은진의 그림에 등장하는 각각의 도상들도 그 맥락으로부터 이탈하여 영기를 지닌 매개체가 되고 있는 것이다.

 

김은진 작업에 등장하는 심장의 이미지는 이러한 측면에서 가장 인상적이다. 심장은 그야말로 인체의 한 부분이다. 하지만 동시에 심장은 인체로부터 튀어나와서 또 다른 몸의 상체를 구성하게 된다. 여기서 시각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인체의 안과 밖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뿐만 아니라 관객은 인간의 생명력을 추상적으로 인식하던 방식으로부터 벗어나서 우리가 숨을 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기와 대면하게 된다. 게다가 작가는 강렬하고 반짝이는 색감을 사용함으로써 관객의 시선을 잡아 둔다. 그저 그렇게 지나가던 인체가 아니라 아예 해부되어서 내부가 외부로 드러내 보여진 신체와 장기의 상태는 성상화와 유사한 정서적 반응을 불러 일으킨다고 할 수 있다. 관객들은 더 이상 간접적인 이야기나 메시지를 떠올릴 수 없으며 마지막 심장 박동수를 듣는 듯한 착각을 갖게 된다. 게다가 산의 모형들과 함께 선반 대 위에 놓여진 심장들은 작가가 자유자재로 자연이나 인간의 생명력을 ‘물건’들로 해체, 재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김은진은 왜 안의 것을 밖으로 끄집어 내었을까?: 집을 뛰쳐 나오다.

대상을 맥락에서부터 이탈시키고 부분과 전체를 혼돈함으로써 소재를 특정한 나레티브나 상징적 의미로부터도 분리시키고 특정한 ‘기’ 혹은 ‘힘’을 부여 받도록 만들고자 한 작가의 의도는 무엇인가? 심장을 거대하게 그리고 그 뭉클 뭉클한 표면을 과장한 김은진의 그림은 과연 어떠한 충격 효과를 노리고 있는가? 물론 이에 대한 적당한 대답을 찾기란 쉽지 않다. 작가의 관심사는 종교로부터 사회 통념, 여성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소재들은 여러 차례 다른 작업들에서 반복되기도 하고 서로 결합되기도 하면서 작가의 비논리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세계가 여러 방면으로 펼쳐지고 있음을 증명해 보인다.

 

하지만 안과 밖의 구분은 여성으로서 매주 교회에 다니면서 스스로를 특정한 사회적, 종교적 정체성 내부에 틀어 막고 있는 작가의 현실을 연상시킨다. 물론 여기서 김은진의 그림이 그녀의 개인적인 삶을 표방한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각각의 물건들은 분명히 안과 밖의 이분법 속에서 힘들어 할 수 밖에 없는 작가의 존재성에 대하여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특히 튀어 나온 심장은 신체의 내부와 외부, 골동품 집에 놓인 ‘산’의 모형은 풍경화의 외부와 골동품 상의 내부, 그리고 나아가서 여성적인 얼굴과 남성적인 신체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이국적인 인물상은 내외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반영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김은진의 2003년과 2005년에 등장하였던 손상되고 더럽혀진 인형의 모습이나 무섭고 권위적으로 보이는 주교의 이미지보다 더 양가적인 의미들을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제 막 짙은 색의 커튼이 드리워진 내부로부터 나와서 여신과 함께 산수 풍경을 즐기는 이국적인 얼굴의 여인(혹은 자화상?)은 마침내 집에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즐기는 듯 하다. 그녀는 무릉도원을 향해 떠나고 있는 듯이 보이며 그녀의 얼굴이 조금 젊어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녀의 어색한 표정과 커튼으로 드리워진 공간은 결국 그녀에게 주어진 자유가 한정적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또한 아름다운 산수 풍경에 등장하였던 산, 생명력을 상징하는 심장은 어두운 실내 선반에 일종의 물건, 혹은 상품과 같이 진열되어 있다.

 

저항과 초탈을 위한 ‘남녀 상열지사’

“보수적인 남성위주의 한국사회의 한 여자로서 엄마로서, 종교인으로서 동시에 현대미술을 하는 작가로서 삶을 조화롭게 만들어 간다는 것은 나에게 매우 혼란스럽고 무거운 삶의 무게를 지게 된다.  왜냐하면 한 개인으로서 내 자신을 들여다 볼 때 내 자신은 그런 사회에서 요구하는 이상적인 삶의 모델과는 거리가 먼 이기적이고 두려움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가 요구하는 삶과 내가 느끼는 내자신의 모습과의 넓은 간극을 극복하려는 포기 없는 노력들이 나의 작업의 주요 모티브가 된다. 성상 등의 종교적 아이콘들과 그것과는 대치되는 나의 유약하고 고단한, 완벽함과 거리 먼 나의 삶의 현상들을 화면에 대립시키거나 마구 섞어서 재현 시킴으로써 이 양쪽 삶의 괴리감이 주는 고통을 객관화 하려 한다. 이러한 나의 예술적 노력은 나의 구도의 한 방법이자 작업의 주제이다.” (김은진, “작가노트,” 2010-11)

 

작가는 자신이 수동적이라고 말한다. 체제에 안주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박차고 나오지도 못하는 일상 생활을 반복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면에서 이국적으로 생겼지만 매우 어색한, 그리고 수동적이며 답답한 실내를 배회하는 무표정한 여성의 모습은 작가의 자화상을 연상시킨다. 한시적으로만 자유를 즐기는 이국적인 여성처럼, 언젠가는 여성성이라는 몸의 한계를 벗어 던지고 싶어하는 양성적인 불상처럼, 수술대에 놓여서 마지막 숨 고르기를 희망하는 심장처럼, 그리고 내면에 까마귀와 같이 불길한 야수적 본능을 숨기고 있는 인물상처럼 그녀의 그림에는 폭풍전야를 경험하면서도 그것을 억누르려는 힘이 공존한다. 그녀의 작업들에 존재하는 확연한 안과 밖의 구분은 이러한 해석을 부추긴다. 게다가 <안녕하세요?>에서 새해 첫 인사를 드리는 그녀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위압적이지만 고개를 푹 숙이고 최대한 자신의 표정을 감추는 그녀의 모습은 다른 한편 애처롭다. 남녀 상열지사 시리즈 둥 <사다리>위에서 수영복을 입고 다양한 정체성을 취하면서 날개 짓을 해보려는 당당한 ‘그녀’의 모습은 귀여우면서 어색하다.

 

모순되고 갑갑한 현실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인 인식은 결국 현대 예술가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이다. 프로이트가 1910년 글 레오나르드 다 빈치: 그의 성장기의 기억(Leonardo Da Vinci, A Memory of His Childhood)에서 르네상스 대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이미지를 불새로 (잘못) 해석하면서 예술은 슬픔을 분노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승화시켜가면서 등장한 정서적, 미학적 해결방법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1] 그리고 이와 같은 생각은 오랫동안, 그리고 현재에도 예술가와 예술의 사회적인 역할을 바라보는 데에 있어 중요한 관점을 이루었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예술의 사회적 효용성을 보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만약 종교와 예술의 공통점이 있다면, 종교 또한 예술과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의 존재와 그들을 둘러싼 이 세상의 고통을 보다 긍정적인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초월해 보기 위한 염원을 담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목욕충만도>(2007)에서 붉은 커튼이 드리워진 갑갑한 실내에서 초탈의 포즈를 취하고 있는 김은진의 모습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세속적인 욕망으로부터의 탈피가 불가능하다면 초탈을 믿는 종교인처럼, 그저 묵묵히 부처와 같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생산적인(?) 대안을 결심한 부인처럼 불상의 이미지는 실존적인 고통과 예술의 역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초탈이나 초극의 길을 걷고자 하는 듯이 보인다. 혹은 <남녀상열지사>에서 함께 어울려 춤을 추고 있는 군중의 모습과 대포로부터 쏘아 올려진 어린아이의 모습은 일상사의 고통을 ‘춤판’으로 승화시키려는 작가의 의도를 엿보게 한다.

 

하지만 과연 그녀의 양성적인 몸이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자아로 이어질지, 초탈하고자 하는 종교인의 염원이 과연 이 생에서 실현될 수 있을지, 예술이 과연 삶의 고통을 이겨내는 데에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 밖에 없다. 초극이나 초탈이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면 놀라운 신기를 지닌 성상화들도 우리의 불안을 떨쳐주고 고통을 치유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실험적이고 비평적인 의도를 지녔던 많은 현대예술가들이 공통적으로 겪어온 시행착오라면 예술가들에게 주어진 가장 현실적인 해결방법은 결국 저항을 계속해 가는 것뿐일 것이다.

 

 

 


 

[1]Leonardo Da Vinci and a Memory of his Childhood,” The Standard Edition of the Complete Psychological Works of Sigmund Freud, Volume XI (1910): Five Lectures Five Lectures on Psycho-Analysis, Leonardo Da Vinci and Other Works, 57-138

© 2018. Koh, Dong-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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