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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예술)이 해석을 필요로 할 때

고동연 (미술사가)


“예술작품은, 그것이 지닌 본래적인 힘과 행운으로, 그것을 만든 작가를 뒤로 하고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그를 앞서서 그의 발명과 지식을 능가할 수 있다.”
- 미쉘 드 몽테이뉴,『협의하는 예술에 관하여』(1580)
1)

 

미술사와 기호학 효과
현대미술에서 작가가 지닌 원래의 의도보다는 해석이, 또는 작가 자신보다는 관객의 시점이 더욱 중요해졌다. 이제는 더 이상 작품의 영속적이고 본래적인 메시지나 가치를 강조하는 일이 무의미해 보인다. 게다가 현대미술에서 기존의 물건들이나 이미지들을 그대로 사용하는 일들은 더욱 빈번해졌다. 저명한 프랑스의 문학비평가이자 대표적인 구조주의, 후기 구조주의자인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주장대로 우리 시대의 미술사와 비평은 저자의 상대적인 지위 약화(극단적으로 죽음)의 시대를 목격하게 되었다.
2)

 

유사한 맥락에서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계몽가인 미쉘 몽테이뉴의 16세기 고전적인 인용은 작가나 작품의 의도를 해석해내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는 우리시대의 미술사가들이나 비평가들에게 그야말로 가장 적절해 보인다. 예술작품은 몽테이뉴에 따르면 작가 자신이나 작가의 의도보다는 작품을 관찰하는 관객들이 위치한 다른 역사적 배경이나 다른 시점들에 따라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게 된다. 실제로 1990년대동안 언어와 연관된 기호학이 미술사의 중요한 방법론으로 등장하면서부터 이미지를 해석하려는 미술사가들이나 비평가들 또한 더 이상 작가가 지녔던 본재적인 의도를 파헤치는 데에는 덜 집착하게 되었다.

 

점차적으로 미술사가들의 최대 관심은 누가 어디서 어떻게 특정한 작품을 만들었는지의 실증적이고 역사적인 명제들로부터 과연 주어진 이미지가 어떻게 다른 시점들에서 서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지 같은 해석의 문제로 옮아갔다. 현대미술사와 미술비평에서 1980년대 이후부터 적극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정체성 이론, 후기 식민주의 이론, 정신분석학 등과 같은 방법론들도 이와 같이 주어진 대상의 의미를 더 이상 고정된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해석자의 몫으로 넘기면서 생겨난 중요한 변화들에 해당한다.

 

따라서 현대 미술사나 미술비평에서 말의 효과, 즉 기호학과 같이 언어체계에 관한 방법론이 끼친 영향은 매우 근본적이며 획기적었다. 물론 어떠한 도상학자나 언어학의 이론들이 미술사나 미술비평에서 사용되었는가의 문제들을 되새겨 보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예를 들어 미술사가 어윈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의 도상학 삼단계나 소쉬르의 언어학으로부터 빌려온 수직과 수평의 이중적인 축들은 미학적 형태들을 언어의 구조처럼 보다 체계적으로 유형화하여 설명하는 데에 있어 큰 기여를 한바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미술사에서 기호학이 영향을 지니게 된 이후 미술사가나 미술비평가들은 전통적으로 절대적인 역사적 의의나 작품의 의도를 증명해 내야한다는 의무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3) 미술사가나 비평가들의 역할과 목적이 변화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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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Que sçay-je?' ('What do I know?' in Middle French; modern French Que sais-je?)라는 편으로 더 잘 알려진 16세기 몽테이뉴의 질문은 기호학이나 비평적인 언어 철학이 등장하게 되면서 확실하고 실증주의적인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회의를 지니게 된 미술사가들이나 역사학자들에게 아직도 유효해 보인다. Michel de Montaigne, Of the Art of Conferring (1580). Richard L. Regosin, Montaigne's Unruly Brood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6), 100에서 인용.

2) Roland Barthes, Image-Music-Text, trans. by Richard Howard (Fontana, 1977), 148.

3)『미술사의 역사』의 저자는 “기호학이 지식의 실증주의적(혹은 확중주의적) 시점을 문제시하여 왔으며,” 결국 미술사와 기호학이 만나게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전통적인 미술사의 학술행위”를 고전적인 의미에서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특정 학문 분야로 제시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Donald Preziosi, The Art of Art History: A Critical Anthology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243.

 

작가의 죽음과 현대미술에서의 말
해석의 중요성이 부각되거나 이에 따라서 의미가 다변화되는 현상은 언어적 체계와 연관된 작업을 하는 경우들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동양화의 문인화는 이미지를 통하여 명확하게 서술되기 힘들 수도 있는 저자의 마음가짐을 문인 스스로의 글을 통하여 전달하고자 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1920~30년대 초현실주의의 음성시는 뜻이 아니라 소리에 기초하여 단어들을 선택, 조합하여 만들어졌다. 이러한 경우들에 있어서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거나 아예 거의 무의미하다. 반면 바르트가 설명하고 있는 네오 다다 작가 사이 톰블리(Cy Twombly)는 의미가 전달되는 단어를 희미하게 쓰고는 지속적으로 그림으로 지우는 과정을 반복하였다. 톰블리의 낙서는 알아 볼 수 있는 글씨에 해당하는 상형문자 형태와 전적으로 의미를 상실한 흔적들 사이에서 머물러 있다. 이로써 그의 낙서는 바르트가 주장하는 쓰기의 역할에 충실한 상태, 모순되게도 “읽히지 않는 상태”로 남아있게 되었다.
4)

 

심지어 언어의 불명확성 자체를 소재로 삼는 작가들도 있었다. 1960년대 말 개념미술의 중요한 창시자인 조셉 코주스(Joseph Kosuth)는 특정한 개념을 전달하는 서로 다른 의미체계를 병치한다. 그는 의자의 이미지와 말, 그리고 실제 의자를 전시한다. 여기서 작가는 리얼리티를 전달하는 서로 다른 표기나 전시 방법 중에서 어떠한 것이 가장 객관적이고 정확한 수단인지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물론 언어철학에 영향을 받은 코주스는 언어에 절대적인 믿음을 문제시한다. 의자라는 단어, 혹은 언어 전체는 다른 의미체계들과 함께 리얼리티를 재현하는 하나의, 그리고 불완전한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시간대를 가리키는 시계들이 나열된 벽 앞에서 태연히 책을 읽고 있는 코주스의 모습에서처럼 언어는 특정한 시공간의 프레임에 갇힌 관람자나 이용자의 제한된 시점에서 통용되고 이해되어지는 한 수단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의 작가들은 자신들이 직접 생각해낸 문구가 아니라 각종 매체를 통하여 이미 잘 알려진 문구, 역사적인 격언, 사연들을 그대로 사용하여 왔다. 여기서 작가들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작가로서의 역할을 포기하고 자연스럽게 그가 인용하고 있는 말이나 문장에 대한 해석의 주도권을 관객들에게 넘긴다. 예를 들어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는 1987년 <무제>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I think. Therefore I am)”는 데카르트의 말을 변형한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I shop. Therefore I am)”라는 문구가 적힌 패널을 백화점의 손님들이 멀리서도 잘 볼 수 있도록 천장에 매달아 놓았다. 물론 관객들은 단어들의 ‘숨은’ 뜻을 헤아리고자 노력하지만 결국 그 해석은 전적으로 관객의 몫이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리 낯설거나 어렵지 않은 단어나 문장들은 관객의 참여를 촉발시키기 위한 중요한 미학적 수단이 된다. 다시 말해서 무관심한 듯 남의 말을 베끼거나 차용한 작가는 쉽게 자신만의 의미를 표현해야하는 작가 고유의 책무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다. 대신 그의 주된 임무는 이미 통용되고 있는 문장을 위치한 장소만 치환시킴으로써 관객이 스스로 새로운 해석을 만들어 내도록 유도하는 일에 한정된다. 그리고 해석의 단초는 주어진 단어자체에 있다기보다는 단어가 원래 속하였던 맥락과 그로부터 이탈한 맥락의 경로 속에 암시되어 있을 뿐이다.

 

이번 전시에서도 대부분의 작가들이 경구와 같은 짤막한 단어들을 즐겨 사용하곤 한다. 권경환은 간결하고 단호한 문장들을 비교적 전통적인 화법으로 재구성해낸다. 문장들은 정확한 출처는 불분명하지만 왠지 많이 들어본 적이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김실비는 아예 유투브에 올라오는 이미지들만을 조합해서 작업을 구성한다. 박보나의 영상에서 중국집 레스토랑 메뉴로 구성된 사행시를 중국 교포가 읽고 있다. 그리고 김영은의 악보는 바이올린으로 연주된 단순한 A음의 미묘한 차이를 9가지로 구분하고 기록한 것이다 그녀에게 작곡은 새로운 음의 조합이나 진행을 창조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A음을 바이올린이라는 동일한 악기로 연주하면서 빚어지는 우연적인 차이를 기록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따라서 작가들이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단어나 소리는 비교적 간결하고 일상적이다. 이러한 단어나 문장들은 작가의 특별한 작문 실력이나 이미지를 조작하는 실력을 따로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실제로 사용하는 단어, 문장, 소리들이 하찮고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관객 참여의 폭도 넓어진다고 할 수 있다.

 

작가들이 차용한 언어적 자료들 중에는 얼핏 보기에 개인적이고 특이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것들도 있다. 송상희는 오래전 프랑스 소녀가 친구에게 보낸 답장 엽서를 사용한다. 하지만 발견된 엽서와 짝을 이루는 그녀의 글쓰기 과정은 엽서를 보낸 어린 여성의 삶, 그녀를 둘러싼 세계 제 1차 대전의 역사와 의의를 분석하거나 이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인 인상과 의도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대신 매우 개인적이고 쉽사리 접할 수 없을 것 타인의 역사적 기억에 대한 관객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더욱 자극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엽서를 사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엽서 속에 등장하는 자아의 시점은 작가 자신의 것이라기 보다는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한 허구적인 작가의 시점, 혹은 스스로를 타자화한 작가의 시점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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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Roland Barthes, “Cy Twombly: Works on Paper”(1979) in The Responsibility of Forms, trans. by Richard Howard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5), 158-60.

 

말과 폭력
그러므로 미디어를 통하여 알려지거나 심지어 역사적인 자료들 속에 등장하는 아카이브 속 문장들은 결국 일종의 미끼이다. 특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기보다, 아니 담고 있어도 본래적인 맥락에서부터 한참 이탈한 단어들은 일종의 언어적인 미아(迷兒)이다. 단어나 문장들이 본래적인 맥락으로부터 이탈하게 되면서 소통의 과정은 개방되었다. 예술가는 더 이상 작품의 절대적인 의미나 효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권위자에 위치에 놓여있지 않다. A의 기본음을 연주하는 연주자에 따라 같은 음은 다양하게 변형된다. 그리고 관객들은 해석자로서 새로운 의미와 악보를 만들어내는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반면 맥락으로부터 이탈한 언어, 혹은 언어적인 개체들은 때로는 실제 삶에서의 고통, 갈등, 폭력적인 상태와 연관되기도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정의 작업은 주목할 만하다.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작가는 흔하고 상투적인 사랑의 표현들이 결국 타자와의 소통을 전제로 하지 못하는 상황을 다룬다. 작가는 아포리아 시리즈와 연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너’와 ‘나’ 사이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허공 속에 되풀이되는 사랑의 언어들이,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인의 고독과 비애를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 이번 전시회에 소개되는 <영어 학교> 시리즈에서 작가는 언어를 통한 소통의 어려움을 작가 스스로의 유학시절 경험과 연관시킨다. 그는 주로 런던의 영어 학교들에서 외국어로 영어 어학 코스를 밟고 있는 학생들이 자주 사용하는 가장 초보적이고 기본적인 영어 문장들을 모은다. 여기서 이정은 기호학의 주요 쟁점인 언어소통의 문제점을 추상적이고 관조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외국어로 공부하는 유학생들의 실제 집단 경험과 연관하여 다루고 있는 샘이다.

 

2007년 미국에서 일어난 조승희 사건의 이미지를 차용한 김실비의 작업 또한 언어적인, 그리고 인간적인 소통의 문제점들이 어떻게 실제적인 사회적 문제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김실비는 조승희가 총기난사 사건을 일으키기 전에 유튜브에 올린 “You made me do this”라는 자작 영상과, 당시 주미 한국 대사가 이 사건에 대해 했던 발언 가운데 문제가 되었던 “We are very sorry”의 영상을 번갈아가면서 보여준다. 작가는 실제로는 만나지 않았던 두 인물(조승희와 주미 한국 대사) 사이의 일종의 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물론 이론적으로 이들의 대화는 성립될 수 없다. 조승희의 대사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것이다. 아니 그를 소외시키고 시키고 그의 가치를 미처 알아주지 못한 미국 사회에 대하여 그는 울분을 터뜨리고 있다. 반면,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주미 한국 대사의 발언은 참사의 주범인 한국계 미국인 젊은이를 대신하여 미국사회에 조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 게다가 김실비의 영상편집에서 조승희를 향하여 미안하다고 말하는 듯한 주미 한국대사의 대사는 매우 심각한 사회적 논란의 소지를 지닌다. 결국 극단적으로 자기표현에 능숙하지 못하였던 조군이 불특정 다수를 향해 분노를 퍼붓는 모습은 소통불가의 문제가 지닌 엄청난 심각성과 파괴력을 관객들에게 환기시킨다.

 

실제로 현대미술에서 사용되고 있는 말과 연관된 작업들은 특정한 개인적 문화적 정체성, 서구 패권주의, 전지구화 등과 같은 실제적인 현안들과 연관시켜서 다룬다. 작가들은 언어를 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회적 억압과 권력 불평등의 상징으로 탈바꿈시켜 놓고 있다. 왜냐면 말은 소통을 위한 수단임과 동시에 추상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지식을 생성해내는 도구이기도 하다. 이란의 가부장제와 극단적인 여성차별에 맞서서 코란의 법규가 적힌 글씨 이미지를 자신의 이미지와 결합한 쉬린 네샷(Shirin Neshat)에게 언어는 자신의 모든 일상과 존재를 규정하고 억압하는 수단이며, 영문과 학생이면서도 모순되게도 언어를 통한 사회적 관계 형성에 실패한 조승희에게 언어는 이율배반적인 의미를 지닌다. 아마도 이민 1.5세대인 그에게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었을 영어는 결국 그에게 대신 좌절된 꿈과 엄청난 자기 파괴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언어의 역할과 말의 뜻이 지닌 명확성을 이미지만큼이나 더 이상 신뢰하게 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우리시대에 언어로부터 소외되고 언어로부터 압제를 받는 상황들 또한 더욱 처절하고 폭력적으로 변해간다. 가해자의 입장에서이간 혹은 피해자의 입장에서이건간에.

 

예술작품만큼이나 언어, 혹 말도 더 이상 그것을 원래 내뱉는 화자에게 속하지 않는다. 말이 이미 내뱉어지면 그 힘은 몽테이뉴의 인용과 같이 본래의 의도와 영역을 넘어서게 된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언제나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작가와 관객간의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만 사용될 수는 없다. 현대미술사, 미술비평에서 기호학의 영향이 추상적인 담론에 그치기보다는 실천적인 비평과 사회참여이기를 바라게 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그렇다면 현대미술에서 말이 리얼리티를 반영하는 방식만큼이나 말이 사회적 리얼리티에 간섭하고 변화시키는 방식에 대해서도 보다 적극적으로 생각해보아야할 때이다. 

 

© 2018. Koh, Dong-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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