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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준의 물레, 돌고 도는 역사를 재현하기 위하여

고동연(미술사)

 

 

최근 국내에도 아카이브 열풍이 불고 있다. 공식적인 역사에 대신하여 소외된 덜 잘 알려진, 혹은 각종 다른 이유들로 접근이 용이치 않았던 과거의 역사적 기억에 대한 관심이 국내 현대미술에서도 주를 이루어 오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인문학에서 역사 쓰기와 읽기, 그리고 역사적인 자료의 범위에 대한 문제점들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고 국내 예술계가 이러한 흐름을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1] 물론 한국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에서 역사적 기억을 재건하고 새롭게 바라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동시에 이에 따른 직접적인 정치적, 사회적 파장 또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 국내의 특수한 사정이다. 최원준 작가는 바로 이와 같이 미묘한 부분을 건드린다. 작가가 주로 버려지거나 소외되거나 잊혀진 군사시설물들을 다루어 왔고 이러한 시설물들이 일반인들에게 무감각하게 받아들여지거나 숨겨져 있는 장면들을 중점적으로 포착하여 왔지만 결국 그의 작업들은 오래되지 않은 정치적 의미를 담은 역사적 기억들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최원준은 국내 현대예술에서 과거의 기억이라는 주제가 던져주는 가능성과 문제점들을 함께 고민하도록 만든다.

 

특히 최근 영상매체로 적극적으로 전환한 최원준의 작업들은 그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과거의 ‘기억’들을 다루고 있다. 이제까지 그의 사진 작업이 동시대에 버려지거나 사회로부터 격리된 군사시설, 미군시설, 분쟁지역, 창녀촌 등을 다루어 왔다면 올해 초 평화박물관에서 선보인 ‘고문’ 장면을 담은 흑백 영화나 문래 지역을 다룬 <물레>에서 작가는 동일한 장소와 연관된 과거의 기억들을 파헤친다. 즉 작가의 관심이 보다 역사적이고 수직적으로 이동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최원준은 문래동이 일제시대부터 이름난 공업지대였고 1960-70년대에도 주요한 철광산업의 근간을 이루었으며 공장들이 사라지거나 도시 밖으로 나간 현재에는 영세한 철공업자들과 문래예술공장을 중심으로 한 예술가들이 공존하는 곳이라는 공식적인 문래동의 역사에서 배제된 이야기들을 들춰내고 있다. 첫 번째는 문래동에서는 1980-90년대부터 일감을 잃어버린 영세한 철공업자들의 손에 의하여 거래 자체가 한국에서는 불법인 총들이 생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문래동에 원래 5.16 쿠데타를 위하여 박정희 당시 육군소장이 사용하던 아지트가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문래공원에는 박정희 흉상이 서 있다.)

물론 특정한 장소를 특정한 몇몇 기억들에 기초하여 단정하고 재현하는 것이 적절치 못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것도 부분적으로는 우연적일 수도 있는, 그래서 현재에는 의미가 없을 수도 있는, 혹은 범법행위에 해당하기 때문에 정확한 통계도 나오지 않은 일종의 소문에 의거하여 특정한 장소의 기억을 다루려는 시도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공식적이고 보편적인 역사야말로 실험적인 다큐멘터리 작가들이 지양하고자 하는 것이다. 실제로 근자에는 역사 소설이나 다큐멘터리들이 절대적인 역사적 진위를 밝히기 보다는 몇 가지 흔적들만을 가지고 과거를 상상하거나 각종 이야기들로 풀어나가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다.  <마지막 이야기꾼(The Last Storyteller) >의 다큐멘터리 감독 데벨(Des Belle)은 전형적인 아카이브를 ‘고증된’ 역사적 사실이나 구술사도 아닌 소설 속의 이야기와 접목시켜서 전개시킨다.[2]

 

최원준의 <물레>도 전통적인 다큐멘터리와는 차이를 보인다. 다큐의 1부에서는 현재의 문래동의 모습을, 그리고 2부에는 부분적으로 작가의 실재 경험에 의거하기는 하지만 배우들이 등장하는 극영화로 전환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3부에서 두 작가 (작가 자신과 문래동에서 현재 작업을 하고 있는 작가)로 분한 배우들은 문래동에서 전해오는 중요한 역사적 기억과 연관된 일을 실행한다. 구상적인 조각을 만들어온 문래동의 작가는 문래공원의 박정희의 흉상과 유사해 보이는 조각상을 녹여서 총을 만드는 일에 착수한다. 강력한 군사정권의 상징으로서의 박정희 흉상은 일반 작가들의 손에 총이라는 폭력적 수단을 쥐어주게 된다. 하지만 문래동의 작가는 야산에서 총을 실험하던 중에 실수로 자신을 쏴서 사망하게 된다. 어처구니 없는 영화 속 작가의 사망은 한편으로는 과거의 역사를 재건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의도가 어떠하였건 간에 과거의 기억을 현재에서 재생하려는 시는 영화 속에서이지만 불발로 끝나게 되었다. 돌고 돈다는 의미의 ‘물레’라는 원래 장소명을 반영하듯이 폭력의 역사는 반복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과거의 기억들을 존재하지만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일종의 트라우마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한다. <과거를 재현하다(Present Pasts)>(2003)의 저자 안드레아 휴이센(Andrea Huyssen)이 지적한 바와 같이 결국 과거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한정적이고 아카이브가 흔적에 불과하다고는 하나 과거의 기억을 재현 불가능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 자체야 말로 기존의 공식적인 역사를 옹호하여온 계층이 선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3] 다시 말해서 산업과 근대화 역군, 심지어 군사혁명의 주요한 장소로서의 문래에 관한 공식적인 역사 이외에 폭력적인 힘의 상징으로서의 박정희 흉상이나 범법을 저지를 수 밖에 없었던 문래동의 영세 철공업자들의 애환은 그것에 대한 완전한 재현이 불가능하더라도 망각되어서는 안 되는 주요한 역사적 흔적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료가 남아 있지 않거나 망각될 수 밖에 없는 역사적 상황은 인문학에서 설명하는 기억과 재현의 문제이기 이전에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정치적, 역사적, 군사적 현실이다.[4]  이 때문에 필자는 최원준의 다큐멘터리, 혹은 작가가 말하는 모큐멘터리가 역사에 대한 책임감과 개방된 해석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하여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더욱 기대가 된다.

 

 


 

[1] 미쉘 푸코는 서구에서 지식 생성의 주요한 기초자료로서 아카이브에 대한 학문적, 비평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이러한 관심은 이후 대표적인 해체주의자인 자크 데리다의 <아카이브 열풍(Archive Fever)>(1998)으로 이어졌다.

 

[2] 데벨의 영화는 2002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바 있다.

 

[3] Andrea Huyssen, Present Pasts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3), p. 5.

 

[4] Judith Butler, “Torture and Ethics of Photography,“ in Environment and Planning D 25(6) (2007), p. 957.

 

 

© 2018. Koh, Dong-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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