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h, Dong-Yeon
고동연 高東延
이연숙: 비닐봉지의 지형학

고동연 (미술사, 미술비평)
"가장 초라한 경제를 국부적으로 팽창시키는 힘의 과잉은 사실 가장 위험한 파괴적 요소로 돌변할 수 있다. 그래서 터뜨리기는 고금을 통해 존재했으며 물론 막연한 의식의 형태이긴 했지만 열광적인 연구의 대상이었다. 고대 사회는 터뜨리기를 축제에서 찾았다. 어떤 고대사회에서는 아무런 실용성이 없는 으리으리한 기념 건조물을 세웠다[중략] 그리고 우리는 여가시간을 늘림으로써 잉여의 일부를 흡수한다. 그러나 그러한 여흥만으로 언제나 불충분했다." (조르쥬 바타이유, 『저주의 몫(La Part maudite)』, 1949.)
잉여의 메타포는 현대 문화이론이나 미술비평에서 흔히 등장한다. 쓰고 남은 물건, 즉 쓰레기, 혹은 과잉된 에너지에 대한 메타포는 1930년대 잉여의 미학을 집필한 초현실주의 작가들, 프랑스의 철학자 조르쥬 바타이유로부터 1950년대 프랑스 누보 리얼리스트 작가들, 아예 재활용품으로 공공미술을 진행하는 현대의 디자이너와 작가들에 의하여 끊임없이 사용되어져 왔다. 물론 이러한 역사적 계보에는 쓰레기야 말로 생산과 진보의 신화에 사로잡힌 초기 자본주의에 대한 강한 저항의 정신이 도사리고 있다. 바타이유는 일찍이 자본주의가 원하는 것은 발전이 아니라, 효율은 더더군다나 아니며 결국 잉여를 어떻게 멋있게 ‘터뜨릴 수 있을지’에 집중되어 왔음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가 미술사에서 심각하게 여기는 모뉴멘트, 축제. 제례 및 각종 문화적 행사들이 “잉여의 터뜨리”의 일부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적어도 바타이유에게는 근사한 것을 만들려고 애쓰는 것 자체가 잉여적인 자본주의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타이유는 자신의 글쓰기도 결국 잉여적인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연숙의 비닐봉지를 사용한 예술작업은 흥미롭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단순히 별가치가 없어 보이는 재료를 재활용했다는 의미에서 흥미롭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과 예술가의 역할에 대하여 새롭게 생각해 보게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왜냐면 결국 현대미술에서 정의해온 예술가란 결국 일상적인 경험이나 물건들로부터 전혀 다른 가치를 발견하고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바타이유가 주장하는 ‘터뜨리기’의 임무를 지녀왔기 때문이다. 만약 쓰레기가 자연스러운 자본주의의 한 현상이라면 잉여의 ‘재활용’이나 ‘재맥락화’는 현대미술의 중요한 업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연숙의 봉지작업에 대한 미학적, 비평적 판단이 일단락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보다 구체적으로 과연 어떠한 ‘터뜨리기’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남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이 말하는 가치체제의 전복이 과연 무엇이고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바타이유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잉여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면, 예술가는 그러한 잉여를 자신의 작업의 일부로 삼음으로써 자본주의가 규정한 특정한 가치 체계에 대항할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어떠한 변형을 통하여 작업의 가치가 생성되는지,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가치란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여전히 남는다.
비닐봉지와 재생미학
이연숙이 사용하고 있는 비닐봉지라는 재료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흔히들 옛 어른들이 ‘봉다리’라고 부르는 비닐봉지는 존재양상이 흔하고 다양한만큼 영미권에서 사용되는 명칭도 가지각색이다. 원래 영어로는 비닐의 합성수지적인 측면을 살려서 플라스틱 백, 아예 그 기능에 따라서 가비지(garbage)백, 혹은 트래시(trash)백, 쉽게 모든 것이 다 들어간다고 해서 빈(bin)백 등 다양한 용어들이 공존한다. 1950년대 대중소비문화가 본격적으로 발전되면서 슈퍼마켓을 중심으로 사용되어져온 플라스틱 백은 어쩌면 문화의 대중화, 효율화, 그러나 동시에 환경문제를 아우르는 상징적인 물건이기도 하다. 또한 비닐봉지는 보자기처럼 다양한 크기와 재질로 만들어지고 다양한 기능성을 지닌다. 때에 따라서는 간단한 쓰레기를 나르는 기능으로부터 이삿짐을 나르는 기능에 이르기까지 비닐이라는 재료가 지닌 가변성만큼이나 다양한 기능과 목적에 따라서 사용되고 다시금 제조되는 것이 비닐봉지이다.
작가는 오랫동안 비닐작업을 진행해 오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비닐봉지를 조달한다. 실제로 길거리에서 사용되고 버려진 것을 수거하기도 하고, 슈퍼마켓 매니저에게 부탁하여 기대하지도 않았던 후원을 받기도 한다. 영문학자인 빌 브라운에 따르면 현대사회에서 특정한 물건들의 가치는 매우 복합적인 과정을 통하여 쓸모없는 것으로 인식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서 흥미로운 것은 모든 물건들 중에서 처음부터 쓰레기가 될 운명을 가진 물건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결국 주인과의 관계 변화를 통하여 특정한 물건들이 쓰레기로 여겨지게 된다. 예를 들어 영화 <토이 스토리 1>(1995)에서 아이들이 점차로 커지면서 외면당하게 된 장난감들의 운명이 이에 유사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즉 단순히 인형의 물리적인 상태 때문이 아니라 물건과 그것을 사용하는 사용자 인간과의 다양한 심리적, 물질적 변화를 통하여 특정한 물건이 더 이상 가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쓰레기를 기사회생시키는 것은 단순히 그것의 물리적인 상태만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것의 물리적인 상태보다는 심리적인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실제로 이연숙 작가는 다양한 방식을 사용하여 비닐봉지를 업그레이드 시킨다. 그녀는 비닐과 같이 하잘 것 없는 재료를 사용하되 <광주 쿤스트할레의 집(The House_Kunsthalle Gwangju)>(2011)에서 작가 할머님의 치마저고리를 상상하는 설치를 만들어 낸다. 해파리의 형태로 만들어진 비닐 설치 <나를 재활용해주세요(Re-use Me_Everyone)>(2011)는 성석초등학교의 학생들과 작가의 공동작업이다. 뿐만 아니라 <노란 벽(Yellow wall)>(2013)에서 작가는 아예 멀쩡한 기둥을 비닐로 싼다. 기둥이 지닌 기능성을 변하시키지는 않지만 대부분 빌딩 내부에서 그 존재감이 미비해서 보이지 않던 기둥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내게 된다. 또한 변형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비닐봉지를 모아서 함께 코바늘뜨기를 사용하기도 하고 나란히 부쳐서 전혀 다른 형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혹은 태워서 표면을 변형시키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물건의 형태(뻥튀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비닐봉지의 사회학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잉여의 진정한 터뜨리기를 위하여 단지 비닐봉지의 외형을 변화시키는 것만으로는 만족스럽지가 않다. 최근 작업 <당신의 것 (Yours)>(2008-현재)에서 작가는 비닐봉지를 미학적인 재활용의 매개체로서가 아니라 또 다른 사회적 현상과 가치를 지닌 소재로 접근한다. 그러한 경우에 비닐봉지는 설치의 주재료가 될 뿐 아니라 일종의 연구 대상으로 탈바꿈된다. 예를 들어 작가는 자신이 원래 영감을 받았던 유럽에서 비닐봉지와 한국 내에서 비닐봉지 사이의 차이점에 주목한다. 물론 비닐봉지는 꽤나 ‘보편적’으로 값싸고 버리기 쉬운 소재이지만 작가에 따르면 분명 사회문화적인 차이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환경적인 이슈가 활발하게 논의되는 유럽에서 비닐봉지는 물리적으로만 싼(cheap) 재료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사회적 의미를 내포한다. 비닐봉지는 현재 유럽에서 일종의 에코백과 같이 일회용이 아니라 재활용하는 각종 백들에 밀려서 사회적인 가치에 있어서도 그야말로 쓰레기와 같은 재료로 여겨지고 있다.
작가는 유럽의 도시에서 발견되는 비닐봉지족을 따로 촬영하였다. 그리고 사진에서 비닐봉지의 형태위에만 금박을 입혔다. 물론 금박을 입힌다고 해서 비닐봉지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과 그 경제적인 가치가 올라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사진작업은 비닐봉지가 실제로 어떻게 사람들에게 사용되고 인식되는지에 대한 작가의 분석적이고 체계적인 첫 간섭에 해당한다. 뿐만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이 작업은 비닐봉지의 사회적 가치에 대하여 관객들 스스로 생각해보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이와 연관하여 최근 비닐봉지 로고 시리즈 <5걸음쯤 떨어져서 보기(Looking at 5 steps distance)>(2013)에서 작가는 매체를 다변화한하고 있다. 작가는 2차원의 화면에 수채화와 같이 실상 가장 평이한 매체를 사용하여 비닐봉지를 재현해 낸다. 하지만 이 경우에 비닐봉지가 존재하는 중요한 이유에 해당하는 슈퍼마켓이나 가계의 로고를 삭제하고 봉지들을 재현한다. 여기서 도금한 사진 작업에서와 마찬가지로 로고를 삭제하는 행위는 비닐봉지의 사회적인 가치를 전복시키기 위한 또 다른 방식에 다름 아니다. 왜냐면 비닐 봉지위에 새겨진 로고는 특정한 봉지를 단지 특정한 상표나 계층의 물질소비문화와 연관시켜서 가장 일차적으로 홍보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들고 있는 봉지의 외관이 제시하는 로고를 통하여 우리는 봉지 안에 담긴 물건, 심지어 그것을 들고 있는 사람의 취향과 계층적 분포도를 짐작할 수 있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경우에 다양한 종류의 종이 봉지나 포장지로 이야기를 확대하면 이러한 유추는 더 다양해진다.) 그리고 로고에서 글씨를 삭제하는 과정을 통하여 작가는 결국 봉지에 부가된 사회적 가치를 간섭할 수 있게 된다. 반면에 관객들은 스스로 무의식적으로 인식하여온 우리의 소비문화 환경에 눈을 뜨게 된다.
따라서 최근 이연숙 작가의 비닐봉지는 재활용의 미학이 지닌 오래된 모토, 예술과 삶을 결합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최근의 작업이 매우 적극적으로 사회적 가치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가치 창출의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레지던시를 위하여 울산에 내려와서 새로운 도시/시골 풍경을 접하면서 비닐봉지에 대한 다양한 문화적, 경제적 가치에 관심을 지니게 되었다. 작가에게 비닐봉지는 기능성이나 개인적인 의미를 넘어서 서로 다른 지역이나 사회의 문화적 상황을 현현하는 매체로 거듭나고 있다. 유럽에서 유학생활 중에 비닐봉지를 처음으로 소재로 삼았던 당시로부터 귀국한 후에 한국내의 소비와 포장문화를 접하게 되고 찬란한 공업도시이지만 문화적인 열등감을 갖고 있는 울산지역민들을 접하게 되면서 비닐봉지에 대한 그녀의 관찰력이 한층 업그레이드 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연숙의 최근 작업과 그리고 앞으로의 작업방향이 보다 ‘장소 특정적’인 비닐봉지의 지형학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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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르쥬 바타이유, 『저주의 몫(La Part maudite)』, (1949/한글판, 문학 동네, 2000), p. 64.
2)Bill Brown, “Thing Theory," Critical Inquiry, vol. 28, no. 1 (Autumn, 2001), pp.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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