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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원석의 규호산책

  사람들을 초대하고, 함께 나누는 이야기들이나 소통 자체를 창작의 과정으로 삼는 예술작업들이 국내 미술계에서도 이제 낯설지 않게 여겨진다. 작가 홍원석을 가장 잘 알려지게 만든 아트 택시 프로젝트 또한 이러한 참여예술의 유형에 속한다. 홍원석의 영상에는 일반인들이 등장하며 이들이 예술작업의 시작과 끝, 내용을 주도하게 된다. 작가가 추임새를 넣지만 택시에 타서 택시 운전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일반 참여 관객에 의하여 예술의 내용이 결정된다. 그러나 기존의 미학적 기준에 대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비판을 가하고 있는 참여예술을 무조건적으로 환영할 수 만은 없다. ‘참여적’인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미학적 경험을 대치할만한 사회적인 경험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꼼꼼히 점검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작가는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사회적 관계나 경험을 이야기하고자 하는가?

  아트 택시로부터 배우다.
  홍원석하면 떠오르는 아트 택시는 개념적으로 신선하고 성공적인 프로젝트이다. 아트 택시가 지니는 유동성은 커뮤니티의 개념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상정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평양에 가고 싶은 사람들을 작가가 택시로 모아서 임진각을 향하는 과정을 다룬 <P 택시>에서와 같이 작가는 택시라는 운송수단을 이용하여 의도적이건 아니건 간에 다양한 집단과 개인의 삶에 기민하게 침투하고 그들을 자신의 작업에 참여자로 초대한다. 또한 작가는 2-3개월씩 한 지역에 머물면서 지역의 특수한 상황에 대하여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전개하기도 한다. 작업의 과정이 단순히 참여대상을 교화하거나 그들의 ‘환경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요새 유행하는 말로 대화를 통한 ‘힐링’이라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하지만 홍원석의 택시 영상을 보면서 관객은 그가 택시운전사로만 남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제주도 가시리에서, 경북 영천에서 외로운 어르신들의 교통수단, 말벗, 그리고 짐꾼이 되어주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니콜라스 부리오식의 관계미학에 대하여 비판적이어 온 클레어 비숍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단순 봉사가 예술가들이 가장 잘 하는 일도, 혹은 예술가들의 주된 예술참여의 목적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1) 그런데 문제는 실제 현장에서 작가가 ‘일반인’들과 보다 목적성을 지니고 소통하게 되면서 때로는 간섭을, 그리고 때로는 갈등을 경험하게 되고 생각만큼 쉽게 생산적인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트 택시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가는 제주도 가시리의 동네 어른 분들을 모셔다 드리면서 동네 밖의 소식을 동네 안쪽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웃 강정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동네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로컬의 사람들이 쉬쉬하는 일에 택시 운전수 뜨내기가 떠드는 꼴이 되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타지인으로서 자신의 위치와 운송수단을 사용하여 강정마을의 각종 이벤트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작가가 자신이 접하였던 커뮤니티의 참여를 이끌어 내거나 그들의 삶에 새로운 사회적, 정치적 관계를 만들어내는 일은 요원하기만 하였다.
  문래 공장에서 진행된 프로젝트에서 그러나 작가는 ‘진보적인’ 예술가의 편이 아니라 토박이 철공소 아저씨들에게 더 동정심을 지녔었다. 만약 나이 드신 지역분 들로부터 정치적 견해의 차이를 느꼈다면 반대로 문래 예술공장에서의 경험은 작가로 하여금 결국 예술이라는 명분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이 만들어내는 폐해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들었다. “대부분이 살기도 바쁘신 분들인데 예술가들과 무엇을 같이 하는 것이 그분들에게 이득이 될지 모르겠다”고 작가는 대답한다. 또한 예술가들과 협업한 철공소 주인들과 그렇지 않은 주인들과 나눠지면서 본의 아니게 예술가들이 토박이 철공소 집단 사이를 결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야기하게 되는 것도 목격하였다.
  작가는 영상에서 서로 다른 집단을 인터뷰하면서 오히려 서로의 무관심이나 차이점만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작가는 다른 작가들에게 자신이 “스파이가 아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위치를, 그리고 중성적이고자 하는 의도를 확인시켜준다. 지하철을 타고 홀연히 나타났다가 다시금 홀연히 사라질 수 밖에 없었던 작가의 존재감은 문래에서 그가 경험한 사회적 갈등의 중재자로서 작가의 한계를 드러낸다고도 할 수 있다.  

  규호산책: 틈새를 산책하다 2)
  아트 택시로부터 사회를 변화시키는 생산적인 관계 맺기의 어려움을 경험한 작가에게 이번 홍성레지던시 참여프로젝트 <규호산책>은 의미심장하다. 작가는 2011년 아트 택시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자신의 ‘택시’로 특정한 지역에서 어르신들이나 동네 사람들을 태워다 드리고 소통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하여 왔다. 반면에 <규호산책>에서 작가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대상들과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한다. 천천히 홍성 시가지를 걷는 아버지의 모습과 그가 바라보는 풍경을 담아내는 그의 영상은 흡사 자신이 다루어온 공공, 장소, 참여의 대상들을 초대하기 전에 숨을 고르는 과정처럼 보인다.
  실제로 ‘홍성’은 작가 홍원석에게 모호한 곳이다. 홍성은 도시도 아니고 시골도 아니며 충청도가 고향인 작가에게 자신의 고향과 같이 매우 익숙한 곳도 그렇다고 완전히 낯설지도 않기 때문이다. 덕분에 작가는 홍성주민들과 소통하기 전에 산책을 시작한다. 아니 산책하는 작가의 대안적인 자아-아버지를 앞세우고 홍성이라는 고장을 살핀다. 가시리나 문래에서와 마찬가지로 작가는 크고 작은 정치적 상황들을 만나기도 한다. ‘시골’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바르게살기 운동협회‘의 데모는 작가에게 낯설기만 하다. 대부분 작가가 방문하고 있는 지역들은 서울의 문래동을 제외하고는 정치적인 이슈가 그다지 두드러진 지역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작가는 그곳에서 체류하면서 얼핏 평온해 보이는 어떠한 지역도 정치적인 이슈, 힘겨루기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반 참여자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그들의 의견을 듣고 영상으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는 철저하게 관찰자로 남는다. 이제까지의 작업들이 바삐 참여자들을 자신의 택시 안으로 초대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 자체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규호산책>에서 작가는 뜸을 들이면서 자신이 위치한 그 장소, 사회, 풍경을 연구한다. 만약 참여예술의 필수적인 과정이 자신에게 주어진 참여의 대상을 다시금 관찰하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사회적 관계들에 대하여 곱씹어보는 과정이라면 이와 같이 느리게 걸으면서 홍성을 관찰하는 아버지를 뒤따라가는 작가의 전략은 환영할 만하다.

  참여예술의 숨을 고르다.
  현대미술에서 참여적이거나 사회적 관계를 형성한다는 의미에서 관계미학의 등장은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의무감을 안겨주었다. 순수하게 미학적인 성과 대신에 사회 비평적이고 참여적인 성과가 새로운 비평적 기준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러한 기준 자체가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은 가끔 간과되고는 한다. 사회의 변화는 그리 단순히 성취되는 것이 아니며, 대신 예술에 의해서 성취하고자 하는 노력들은 섣불리 예술의 대중화라는 미명아래 작가들을 형식적인 사회적 ‘의무’에 차출되도록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성급한 성과주의만 배제한다면, 혹은 눈에 띄는 관계 맺기에만 총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게릴라적인 아트 택시는 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즉 사회가 서로 다른 이해와 갈등의 관계로 엮어 있다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인지시켜준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홍원석의 아트 택시는 참여예술에서 관심을 두고 있는 각종 사회적 리얼리티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실상 갈등이 배제된 참여예술은 미리 잘 조성된 인위적인 리얼리티의 반영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현재 진행 중인 규호 산책이 작가로 하여금 관찰자로서의 내공을 쌓아가게 해줄 것으로 믿는다. 평소에는 별일 없이 지내는 철공소 아저씨들과 예술가들이 한순간에 친구나 적으로 변할 수 있듯이 조용한 시골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데모의 현장은 우리가 안고 있는 복합적인 사회적 관계와 이해를 그대로 반영한다. 앞으로도 홍원석의 아트 택시가 변절자로서의 스파이가 아니라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스파이로서의 거듭 성장해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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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숍은 참여 예술을 둘러싼 이상주의적인 수사학이나 이상주의를 경계하여 왔다. 그의 최근 저서로는 Claire Bishop, Artificial Hells: Participatory Art and the Politics of Spectatorship (London: Verso, 2012)이 있다.

2) 작가는 작품명은 부친의 호를 이용하고, 한문 표기는 틈새를 관찰한다는 의미의 한자어로 정하였다.

 

© 2018. Koh, Dong-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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