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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혜경과 남자들: 실연당한 관객은 무엇을 해야 할까?
Hyekyung Ham's Men: What Can the Broken-Hearted Audience 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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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연 (미술사)


배신자를 향하여
“메일을 써야 하나 전화를 해야 하나?” <거짓말하는 애인>(2014)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대사이다. 유사한 남성의 목소리이지만 약간의 안정된 톤으로 <멀리서 온 남자>(2015)의 서두 부분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흘러나온다. “최근에 제가 사랑했던 로라가 만난 지 2년 만에 결코 잊을 수 없는 방법으로 절 배신했습니다.” 위의 대사는 얼핏 듣기에는 매우 개인적이다. 자조적이면서도 지나치게 자신감이 결여된 화자의 어투와 대사 내용은 실연의 슬픔에서 못내 빠져 나오지 못하는 불쌍한 신파극의 캐릭터를 연상시키기까지 한다. 하지만 실상 영상 화면에서 관객은 대사를 내뱉는 화자를 직접 볼 수 없다. 아니 말하는 화자의 신체는 의도적으로 가려져 있다. 대신 우리는 화자가 움직이면서 바라보는 창밖의 풍경을 함께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실연을 당한 바로 그 남자의 눈을 통하여 투영된 풍경은 화자의 대사 내용과 맞아 떨어지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서 이미지를 통하여 화자의 정서적인 상태를 엿보는 일도 여의치는 않다. 오히려 화자의 독백은 완벽하리만큼 동어 반복적이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유행가의 가사처럼 반복된다. ‘떠나간 그녀를 나는 지금 안간힘을 써서 잊고자 한다. 과연 실연당한 나는 성공할 수 있을까? 나는 그녀를 잊고자 한다. 그러나 나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왜 작가는 진부하고 지루한 대사와 소재를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가? 작가 스스로는 한사코 자신이 로맨스 작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스터리 맨>, <거짓말하는 애인>, <멀리서 온 남자>에는 연일 흘러간 프랑스 영화나 흑백 영화시대에서나 자주 등장할법한 대사들이 흘러나온다. 이에 필자는 함혜경의 자조적인 대사들이 직설적으로, 혹은 내용적으로 연인들 간의 불신과 애증의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객과 작가와의 복합적인 연인관계를 상정하고 있음을 제안하고자 한다. 자막만큼이나 그 존재감이 상당한 내레이션, 정확히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끝없이 우리의 시선을 유도하는 특정한 카메라 시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밖의 실제 세계에 뛰어들거나 주인공의 정확한 시, 공간적 배경을 보여주지 않는 함혜경의 작업은 한사코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 배신남, 배신녀의 이미지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 놈 목소리
작가는 멋진 영화나 소설에 등장할 법한 독백의 대사들이 실제 경험보다는 영화적 리얼리티로 유래한 것임을 재차 밝혀 왔다. 그는 외국 영화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다양한 장소들을 동경하여 왔고 그녀가 동경해 온 장면들이 그에게 전달해 주었던 풍만한 감수성과 혼동의 기억을 재생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함혜경의 영화 속 장면들은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영원히 모호하고 낯선 두려움의 대상들이기도 하다. 작가는 오래 전 외국 영화를 보면서 그의 기억 속에 잔존하고 있는 영화 속 장소들에 대한 모호한 느낌을 애써 재생하고자 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함혜경은 공감각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그 무엇을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작가 스스로도 화자의 독백에 다른 배경음악, 자막들이 덧입혀지게 되면서 주인공의 독백이 “명확하게 들린 다기 보다는 불편한 효과음으로 남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서 자막 자체가 모호함을 가중 시킨 다기 보다는 자막과는 달리 개별적으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가 시각적으로 명확하게 기술된 언어적 표현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흉내 내는 내레이터들을 섭외한다. <거짓말하는 애인>에서 어릴 적 영국으로 이민 간 한국 남자를 기용하였고, <I am as I am>에서는 한국 여성을 기용하였다. 물론 이러한 언어적인 틈새, 혹은 완벽하지 않은 상태가 관객에게 잘 전달되고 있는지에 대하여 필자는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어렵지 않는 대사들을 읽어내는 특유의 악센트 들이 듣는 이의 호기심을 자극한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다. 

영화 사운드의 고전적 이론서인 『소리의 거울(The  Mirror)』(1988)에서 저자 실버만(Kaja Silverman)은 목소리가 지닌 복합적인 기능에 주목한 바 있다. 프랜시스 코폴라(Francis Coppola)의 명작 <대화(Conversation)>(1974)의 예를 들면서 실버만은 목소리가 시각과는 달리 관객, 혹은 영화 속 주인공의 이성을 흔들어가는 과정에 주목하였다. 영화 속 도청 전문가인 주인공은 어떠한 잡음 속에서도 목소리를 잡아 낼 수 있는 도청전문가이자 냉혈한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잡음 속에서 발견해낸 불규칙한 여성의 하이톤(high-tone) 목소리에 꽂히고 만다. 불규칙하고 감정이 섞인 그녀의 목소리는 밤새 주인공의 귀, 그리고 뇌리에 남게 되었고 결국 그는 목소리에 이끌려 이전과는 다른 행보를 걷게 된다. 이를 통하여 실버만은 시각과 언어의 단계 이전의 어머님의 “신체를 감싸는 담요(sonorous envelope)”와 같은 목소리의 효과를 강조하였다. 특히 역사 다큐멘터리에서 사용되는 남자의 목소리가 친근하면서도 정보의 신뢰성을 한 단계 올려줄 수 있는 중요한 수단 이어 왔다면 여성의 목소리는 무의식적인 인간의 감수성을 보다 총체적으로 자극하여 왔다.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불편한 효과음”인 목소리는 화자의 발음이나 목소리가 불분명할 때 그 효과가 배가된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작가는 의도적으로 여러 외국어를 모국어가 아닌 내레이터에게 부탁해서 읽힌다. <거짓말 하는 애인>이나 <멀리서 온 남자>에서 영어, 그것도 영국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 <미스터리 맨(Mystery Man)>(2013)에서는 이란어, <Je suis comme Je suis>(2014)에서는 불어가 각각 사용된다. 단조로운 목소리의 톤이 소심하고 내성적인 화자의 정서적인 상태를 재현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외국어로 진행되는 화자의 독백은 듣는 이의 정서적인 불편함을 가중시킨다. <대화>에서 주인공의 뇌리에 박힌 수수께끼의 목소리처럼 명확히 알아 들을 수 없는 대사는 <대화>에서 주인공의 경우에서와 같이 모호한 상태로 듣는 이의 뇌리에 남게 된다. 

나를 외면한 그대
반복적인 저음의 목소리가 자아내는 복합적인 정서적 반응 이외에 얼굴을 돌린 주인공-그-그녀(혹은 자아의 알터 이고)의 존재는 관객에게 노출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서 그의 청각적인 존재감만큼이나 물리적인 존재감은 관객에게 모호하고 낯설다. 그의 목소리를 접하고 들을 수는 있지만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는 상황은 화자의 시선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그를 느낄 수는 있으나 그의 신체를 볼 수 없는 상황에 비견될만하다.

그런데 우회적으로 암시된 화자의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존재감은 또 다른 방식으로 해체된다. 함혜경의 영상에서 화자는 계속적으로 자신의 시, 공간적인 배경을 모호하게 만든다. 그는 지금 여기에, 그러나 계속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존재이다. 때로는 화면 속에서 그의 시선도 사라지고 목소리만 남게 되기도 한다. <거짓말 하는 애인>에서 카메라는 강을 건너고 있는 화자의 시선을 따라 창문 밖의 풍경을 비춘다. 그러나 이내 신발 공장 안 자수를 천위에 새기고 있는 기계의 바늘에 카메라가 집중한다. 때로는 움직이는 화자를 따라, 때로는 화자의 머릿속에서 암시된 과거의 장소나 물건들을 따라 카메라는 움직인다.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운송수단 안에 놓인 화자의 시선은 동어반복적인 인상을 준다. 한사코 떠나간 연인을 그리워하면서도 그를 잊지 못해 푸념을 끝없이 늘어놓는 화자의 독백처럼 창밖의 풍경은 끝없이 스쳐가고 또 스쳐간다. 

실연당한 관객은 무엇을 해야 할까?
“실연당한 남자는 무엇을 해야 할까?”는 <멀리서 온 남자>의 말미에 등장하는 대사이다. 생뚱맞기는 하지만 자동차를 몰고 끝없이 방황하던 화자에게는 매우 적합한 대사이다. 방향성의 부재는 함혜경의 영상에서 사용되는 대사, 전개과정, 이미지들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이다. 정확히 동일한 장면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가도 가도 끝없는 창밖의 풍경은 애초에 화자가 목적지를 가지지 않았었음을 우회적으로 암시한다. 그렇다면 실연당한 남자는 무엇을 해야 할까? 혹은 실연당한 관객은 무엇을 해야 할까? 

함혜경 작업에서 흥미로운 또 다른 부분은 그가 한사코 사랑과 연관된 소재를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랑은 한편으로는 가장 완벽하게 자아가 자아의 한계를 극복해서 타자와 결합할 수 있는 자기 계도와 구원의 종착역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랑은, 아니 사랑의 실패는 영원히 내가 혼자 이 세계에 남겨져 있음을 일깨워주는 잔인한 경험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프로이트(Freud)가 이론화한 페티시즘(Fetishism)이나 멜랑콜리아(Melancholia) 현상과 유사하게 인간의 욕구 충족이 실패할 경우 그에 대한 아쉬움은 결코 극복되지 않는다. 우리는 부질없이, 반복적으로 대체물을 찾아 나선다. 함혜경의 영상에 여지없이 등장하는 연인에게 버림받고 배신당한 화자가 동어 반복적으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는 것도 포기하지 못하는 인간의 습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혜경의 화자가 읊어대는 사랑의 메시지를 단순하게 해석할 수는 없다. 그것은 연인 간의 사랑보다는 오래된 영화를 동경하는 작가와 그 작가의 영상을 감상하는 관객과의 관계를 통하여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화자의 독백이나 이미지가 전달되는 방식을 통하여 작가는 관객과의 밀당을 시도하며 관객의 실연당한 경험도 결국 지속적으로 명확한 정보와 이미지를 제공받지 못하게 되면서 생겨난다. 왜냐면 끝없는 자기 회의와 질책을 오가면서 고속도로를 달리는 <멀리서 온 남자>의 화자처럼 관객도 끝없이 펼쳐진 감미로운 음악과 화면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아름다운 장면들은 결국 우리를 배신한다. 떠나간 연인을 극복하지 못한 화자처럼 관객의 기억 속에는 감미로운 장면들의 잔상은 아쉬움을 가중시킨다. 모호한 채로, 아니 모호할지라도. 영화광인 함혜경 작가가 어려서부터 보아온 동경의 장소들이 모호한 채로 작가에게 남아 있는 것처럼.

Dong-Yeon Koh, "Hyekyung Ham's Men: What Can the Broken-Hearted Audience Do?," Exh. Cat. for Hyekyung Ham's One-Person Show, My Thought About You, Window Exhibition at The Sewoon Arcade, Seoul, 2015.

© 2018. Koh, Dong-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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